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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일전선운동(좌우합작운동), 정당통일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임정개조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우익진영통합운동, 민족유일당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성학교유지운동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일전선운동(좌우합작운동)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당통일운동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정개조운동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우익진영통합운동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유일당운동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성학교유지운동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되고 교민단에서 운영을 맞게 되면서 학무위원회를 두어 인성학교의 재정확보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상해 교민들로부터 징수하던 교육비를 1년에 1元에서 2원으로 책정하여 징수하였고 학생들도 자치적으로 연주회연예회 등을 개최하여 그 입장수익을 학교유지비로 적립하였다. 또한 교사들도 자신들의 월급을 모아 교사건축비에 충당하도록 하였으며 한인유학생회에서도 교사마련을 위하여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성학교의 폐교위기가 알려지자 동아일보에서는 해외동포위원회를 구성, 건축비를 모금하여 인성학교에 大洋(중국화폐단위) 1,144원을 보내기로 하였다.
1926년 인성학교는 국내외 뜻있는 인사들의 관심 속에서 학교의 위치를 불조계 백래리몽 마낭로 협성리 1호에 교사를 마련하고 이전하였다. 그렇다고 재정적인 어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동아정국의 변화와 교민사회의 불안, 임정의 약화 등이 자금확보에 어려움을 가져와 만성적인 재정위기는 계속되어 거의 폐교 직전까지 이르렀다. 이에 교민사회에서는 학교를 절대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새로운 학교운영방안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1928년 1월 교민단 인사 51명이 인성학교유지회를 발기하고 동년 2월 25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인성학교유지회 규약을 통과시켰다.
동년 3월 16일 집회에서 규약에 따라 집행위원 선거에서 39명의 집행위원을 선출하고 그 중 상무위원으로 이동녕 등 9인을 선출하였다. 집행위원회는 서무학무재무 3과를 두어 학교를 유지, 운영하는 모든 업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이어서 동년 10월 20일 176명의 유지회원 명부를 작성하여 통신투표로서 집행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집행위원장에 秦熙昌, 상무위원에 선우혁김두봉윤기섭김철안창호정태희송병조한진교이연옥김현구이준태엄항섭 등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유지회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인성학교의 어려움은 가시지 않고 오히려 더욱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선상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단체 및 운동가들이 차츰 주도권을 장악해가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독립운동자는 보호해주어도 공산주의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프랑스조계 당국자들의 강경한 태도에 그동안 모든 운동계열에 집합장소로 개방하였던 인성학교는 사회주의계열 단체에게 개방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난 갈등이 심화되었다. 또한 1931년 3월 공동조계의 일부 한인들이 친일동족상애를 표방하며 상해조선인친목회를 조직하였다. 이들 친일세력들은 임정 및 독립운동단체들과 대립 상극관계에 놓여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1932년 일본제국주의는 소위 상해사변을 일으켜 불조계 당국에게 임정을 비롯한 항일독립단체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또한 공동조계에도 계엄령이 선포되고 있는 와중에 동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를 비롯한 애국단체들은 프랑스경찰과 일본영사관경찰에 쫓긴 바가 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성학교도 프랑스조계 당국의 집회금지령으로 휴교령을 내려 학교를 문닫았다가 그해 9월에 개교하게 되었다.
상해를 점령한 일본제국주의는 친일세력인 조선인친목회를 앞세워 인성학교에 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친목회는 우선 인성학교를 온건한 교육기관으로 바꾸는 계획을 세워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과 인성학교 당국자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1935년 10월 일본 총영사관은 당시 인성학교 선우혁교장에게 1935년 11월 10일부터 일제총독부 발간 국정교과서를 교재로 채택하여 일본어를 국어로서 교육할 것을 일방적으로 명하였다.
이에 학교당국자는 11월 4일 학부형회와 유지회를 소집하여 대책을 협의하였으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학교 당국에 일임하였다. 그리하여 11월 11일 교장을 비롯한 인성학교 전직원은 총사직을 결의, 무기휴교상태에 들어갔다. 이로써 부속유치원만 그대로 운영하고 1917년 설립되어 18년 동안 상해에서 한국교포들의 초등교육을 담당하였던 인성학교는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뒤 인성학교를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1945년 해방 직후 상해교민들에 의하여 개교, 한인 아동들에게 국어국사영어를 교육시켰다.
Ⅸ. 결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이래 외교활동을 통한 국제적 지원과 지지 확보를 중요한 운동방략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임정은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 1921년의 워싱턴회의에는 직접 대표들을 파견하여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끌어내려 하였고, 그 밖의 각종 국제회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태평양전쟁 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주로 국제여론의 향배에 영향이 큰 국제회의나 강대국 조야를 향한 선전활동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임정은 외교선전활동의 범위를 벗어나 연합국으로부터 교전단체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대일전쟁에 참여하여 교전단체 승인을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독립을 획득하고, 정부자격을 승인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활동의 주된 상대국은 중국과 임정이었다. 중국은 임정이 망명하여 있던 주재국이었던 만큼 중국의 임정에 대한 정치적 태도는 임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또 태평양전쟁에서 대일전쟁을 주도하였던 것은 미국이었던 만큼, 미국의 임정에 대한 태도 역시 임정의 당면한 대일전쟁전략 수행을 위해서나 미래의 정치적 향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오랫동안 미국에서 대미외교를 담당하였던 이승만의 존재로 인해 임정의 대미외교는 이승만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김광재(2011), 일제시기 상해 인성학교의 설립과 운영, 동국대학교사학회
김지암(2007),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 각 당파의 관계,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이현희(2000), 임시정부의 숨겨진 뒷 이야기, 학연문화사
장영수(2010), 임시정부헌법의 역사적 의미와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 고려대학교 법학연구원
최선웅(2008), 1924년~1927년 상해 청년동맹회의 통일전선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근현대사학회
한시준(2003), 민족유일당운동과 홍진, 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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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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