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의 행정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고려후기의 행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고려후기의 행정

제 1절 행정환경
1.무신의 난
2.최씨의 집권
3.몽고의 침입과 강화

제 2절 행정제도
1. 무신정권의 행정기구
2. 몽고지배하의 행정기구
 ▶관제의 변화◀
 ▶왕실용어의

제 3절 행정정책 및 관리
1. 정치․행정 부문
 (1)항몽자주정책
 (2)여말의 북진정책
 (3) 공민왕의 개혁정책
2. 경제․사회 부문
 (1) 농장의 확대와 토지개혁정책
 (2) 민란의 발생과 신분질서의 개편정책
3. 문화부문
 (1) 조계종 진흥정책
 (2) 성리학의 수용정책
 (3) 과학․기술정책

제 4절 행정주체
1. 무인정권
 (1) 무신정권의 성립
 (2) 무신정권기의 정치형태
 (3) 무신정권기의 사회
 (4) 무신정권기의 불교
 (5) 무신정권의 대몽항쟁
2.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
 (1) 연원
 (2) 등장배경
 (3) 세력기반
 (4) 사상
 (5) 고려 말기의 형태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간단 비교


부록

본문내용

석자의 수가 50~80명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공녀
원(元), 명(明)나라의 요구에 따라 고려, 조선에서 여자를 바치던 일이다. 원의 공녀요구이유는 복속정책(服屬政策) 또는 원과 고려의 친근정책(親近政策) 때문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원나라 왕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기철의 누이동생이 원 순제의 황후가 되어서 태자를 낳음으로써 기철이 원을 등에 업고 권세를 부렸다는 기씨 일족의 예화가 공녀의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에서도 명나라에 공녀를 바쳐야 했는데 1521년 중종 16년에 하등극사(賀登極使)로 홍숙(洪淑)을 보낼 때 공녀의 철폐를 요구하여 명나라의 허락을 받음으로써 공녀문제는 일단락 되었다.
응방
고려, 조선 시대에 매의 사냥과 사육을 위해 두었던 관청이다. 응방의 제도는 원이 고려를 복속시킨뒤 원에서 들어와 그들이 조공품으로 요구하는 해동청(海東靑:사냥매)을 잡고 길러서 원에 보내기 위해 설치하였다. 몽고사람들이 당시 고려의 매를 굉장히 귀하게 여김으로써 응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원나라 관리들과 친해짐으로써 세력을 잡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도 응방을 그대로 두고 매의 진상을 돕게 하였는데 후에 이의 폐단이 논의됨에 따라 1517년 중종 12년에 남부지방은 매의 진상과 응방을 폐지하고 평안함경도에만 응방을 두었다.
권문세족의 기반 관련문헌
나라에서 나이 어린 똑똑한 자들을 골라서 몽고어를 배우게 하였는데, 조인규도 여기에 선발 되었다. 그러나 자기 동배들보다 특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을 닫아걸고 3년 동안 몽고어를 공부한 결과 마침내 통달하였다. 명성을 얻고 제교의 관직에 임명받았다. 그 후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고려사>조인규
마땅히 (종친은) 누세(累世) 재상을 지낸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고, 재상 집안의 아들은 종실의 딸에게 장가들 것이다. ... 신라의 왕손인 김혼 일가는 역시 순경태후의 숙백(叔伯)집안이며, 언양 김씨 일종(一宗)과 정안임태후 일종, (그리고) 해주 최씨, 평강 채씨..., 파평 윤씨, 평양 조씨는 모두 누대공신이요, 재상지종(宰相之宗)이니, 가히 세세로 혼인을 하여 이들은 종실의 여자에게 장가를 들고 딸은 비로 삼을 만하다. <고려사>충선왕1년
근래에 간신이 날뛰어 나라의 정권을 농락하며 질서와 규율을 파괴하고 공사(公私)의 토지와 백성들을 모두 빼앗고 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고 국고는 말랐는데 권력을 잡은 자들만이 부유하고 창고가 넘치니 매우 가슴 아프다 .... <고려사>충렬왕
이 대에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등이 자신들의 나쁜종을 시켜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모두 물푸레나무(수정목)로 때리고 이를 빼앗게 하였다. 땅주인이 비록 관가의 문권(권리문서)을 가지고 있더라도 감히 항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물푸레나무 공문(公文)’ 이라 하였다. <고려사>
무신정권 집권기구 정리
중방
무신정권이 성립한 이후 처음 지배체제의 중심이 된 것은 상장군, 대장군의 집회기관인 중방이었다. 최고의 국가행정이 중방에서 무신들의 손으로 처결되었다는 것은 재래의 문신 중심의 지배체제에 비하여 분명히 큰 변화였다. 그러나 이 중방은 무신정권의 성립이후 처음 생긴 기구가 아니라 과거부터 계속 존재해 내려온 무반 안에 있는 상설기구였다.
교정도감
최충헌이 설치한 특수 정치 기구로서 최씨 정권의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원래는 반대파를 적발, 숙청하기 위하여 설치되었으나,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기구로 변하였다. 그 책임자인 교정별감(敎定別監)은 형식상 왕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최씨 무신 정권이 타도될 때까지 실력자에게 자동적으로 계승되었다. 즉, 최충헌에 이어 최우, 최항, 최의의 3대는 물론이고, 김준, 임연, 임유무도 그 자리에 있었다. 무신 정권이 끝나면서 교정도감도 없어 졌다.
정방
최우가 인사권 장악을 위해 사저(私邸)에 설치한 기관으로, 최씨 정권 지배기구의 하나였다. 그 이전에도 인사권은 최씨 정권에 있었지만 정방의 설치로 제도화되었으며, 이로써 무신 정권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정방에는 무신뿐만 아니라 문신들도 함께 정무를 보았는데, 이것은 정방이 지닌 특성으로 문신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으며, 무신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국가 기관으로서 정방이 유지되어 나간 이유가 되었다. 공민왕이 폐지하였다.
도방
고려 무신 정권의 사병(私兵) 집단.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鄭仲夫)를 살해하고 집권한 뒤,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처음으로 조직하였다. 이의민(李義旼)이 집권한 후 이를 폐지하였으나, 최충헌(崔忠獻)이 이를 다시 부활,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이 때부터 도방은 근위대로서 삼별초(三別抄)와 함께 최씨 정권유지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무신 정권의 종말과 함께 폐지되었다.
서방
국정 자문기관으로서 설치했던 특별관청. 1227년(고종 14) 무렵 최우(崔瑀)가 자기 집에 임시로 설치하였다. 설치목적은 무신정변 이후 소외되었던 문신과 유학자에게 고문(顧問) 역할을 맡김으로써 그들을 회유하고, 최씨 무신정권을 강화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 기관은 서방삼번(書房三番)이라 하여 문신과 유학자를 3번으로 나누어서 교대로 숙직하게 하며 국정에 관한 자문을 담당하게 하였다. 서방은 도방(都房)·정방(政房)과 함께 최씨정권의 권력기구였으나, 도방은 무신의 숙위기관이고 정방은 인사행정기관이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최씨정권의 몰락 후에는 김준(金俊)에게 계승되어 임연(林衍)을 거쳐 임유무(林惟茂) 때까지 존속하였다.
삼별초
최충헌(崔忠獻)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崔瑀)가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몽골병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전위(前衛)로서 다분히 사병적(私兵的)인 요소도 있었으나, 항몽전(抗蒙戰)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골병을 괴롭혔고,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 가격1,8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3.08.25
  • 저작시기2013.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7483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