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의 정치 - 조선의 건국,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유교 정치 실현, 중앙 정치 체제, 붕당의 출현, 명과의 관계, 여진과의 관계, 일본 및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왜군의 침략, 광해군의 중립 외교, 북벌 운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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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세의 정치 - 조선의 건국,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유교 정치 실현, 중앙 정치 체제, 붕당의 출현, 명과의 관계, 여진과의 관계, 일본 및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왜군의 침략, 광해군의 중립 외교, 북벌 운동 전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근세의 세계

2.1 조선의 건국
2.2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정비
2.3 유교 정치의 실현 노력
2.4 문물 제도의 정비

3.1 중앙 정치 체제
3.2 지방 행정 조직
3.3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3.4 관리 등용 제도

4.1 훈구와 사림
4.2 사림의 정치적 성장
4.3 붕당의 출현
4.4 붕당 정치의 전개
4.5 붕당 정치의 성격

5.1 명과의 관계
5.2 여진과의 관계
5.3 일본 및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6.1 왜군의 침략
6.2 수군과 의병의 승리
6.3 전란의 극복과 영향
6.4 광해군의 중립 외교
6.5 호란의 발발과 전개
6.6 북벌 운동의 전개

참고문헌

본문내용

강화되었다.
6.3 전란의 극복과 영향
수군과 의병의 승전으로 조선은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명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으며, 관군과 백성들이 합심하여 행주산성 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 이에 왜군은 서울에서 후퇴하여 경상도 해안 일대에서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한편, 조선도 전열을 정비하여 왜군의 완전 축출을 준비하였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였다.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1597).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다시 후퇴하였다. 결국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임진왜란은 국내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적으로는 왜군에 의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과 질병으로 인하여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토지 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고 식량이 부족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명첩이 대량으로 발급되어 신분제의 동요를 가져왔으며, 이몽학의 난과 같은 민란이 도처에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와 경복궁, 서적, 실록 등 기타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임진왜란은 대외적으로 일본의 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활자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편,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다.
6.4 광해군의 중립 외교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압록강 북쪽에 살던 건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6.5 호란의 발발과 전개
인조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와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 이르렀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철산 용골산성의 정봉수와 의주의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였다. 본래 후금의 1차적인 목표는 중국 대륙의 장악에 있었고, 조선도 아직 적극적으로 항전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화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심양을 수도로 하였다. 군신 관계를 맺자는 청의 요구에 조선에서는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청의 요구에 굴복하지 말고 전쟁까지도 불사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결국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청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은 청과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고, 두 왕자와 강경한 척화론자들이 인질로 잡혀갔다.
청군의 침입은 왜군의 침입에 비하여 기간이 짧았고 지역적으로도 일부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청군이 거쳐간 서북 지방은 약탈과 살육에 의하여 황폐해졌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컸다. 그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에 따라 청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적인 우월감으로 인하여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6.6 북벌 운동의 전개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과 군신 관계를 맺은 조선은 겉으로는 청에 사대하는 형식의 외교를 추진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은밀하게 국방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였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그 뒤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의 움직임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북벌론은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처지였던 서인들이 계속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인조는 서인 중 일부 소장파들의 강경한 척화 주전론이 청의 침략을 불러들였다고 생각하여 일부 남인을 등용하였다. 이에 서인들은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반대 세력들의 진출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서경덕 외 저,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사, 엔트리 2013
백유선, 신부식 외 저,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3
강응천 저,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다산북스 2013
김종권 저, 김종권의 레알 한국사, 세경 2014
고종훈 저, 한국사, 21세기북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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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1.24
  • 저작시기2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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