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식민사학자 -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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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 이병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및 웅녀)를 수호신으로 받들어 산정에 신성을 만들어 때를 따라 제사하였던 것이다. 인구의 증가 산업의 발달로 인하여 국도(國都)의 천동(遷動)이 생기고, 정치의 조직도 다소 변경되는 동시에 군장의 권력이 유력하여 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단군도 시조신으로 받들게 되어 천제(환인) 천왕(환웅)과 아울러 북조선을 대표한 이른바 삼신(삼성)을 형성하여 마침내 삼위일체적인 수호신이 되고 말았다. 단군이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다는 것은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시조신의 신사(神祠) 구도(舊都)아사달에 있었던 것을 의미한 것일 것이다.
→그가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았다라고.. 누가 말을 했나.
22쪽~23쪽
다음에는 이른바 기자조선에 관한 문제인데, 비과학적인 기자동래설을 부인하는 이때에 종래의 전설 그대로 믿기 어려움은 물론이다. 그러면 그 정체는 무엇인가. 나의 연구한 바로는 소위 기자조선은 토착조선인인 아사달사회의 새로운 지배씨족이 구지배씨족에 대신하여 새로운 통치체제를 이룬데 불과한 것으로 신지배씨족은 기씨가 아니라 후일의 한씨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중략)…
이 한씨조선의 최성기는 중국의 전국시대에 당하고 당시 조선은 지금 대동강유역을 근거로 하여 그 영토가 서으로 요동지방까지 뻗었었다(즉 요하유역에 까지).
…(중략)…
한씨조선의 주위에는 남에는 진번(금자비령이남한강이북), 동에는 임둔(금함남일대강원북단), 동북에는 예맥(래의의 특수예맥이니 압록 혼강유역)이란 여러 부족연맹의 사회가 있었지만, 조선은 거기에 우이를 잡았던것 같다. 또 조선원북에는 부여국이 있었고, 진번 남쪽에는 무수한 부족국가가 산재하여 중국인은 이를 진국이라 총칭하였는데, 남북 제족은 다 같은 우리 민족이었다.
→어, 뭔가 이상하네?
24쪽
위만은 사기(사마천저)에 연인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국적상으로 말한 바일 것이다. 그가 무리를 거느리고 조선에 입국할 때에 『椎結·蠻夷服』(즉 상투를 짜고 조선옷을 입었다는 것이니, 椎結은 우리 민속의 한 특색이었다)하고 왔다는 사기의 기사라든지 또 준왕이 처음 위만을 신임하여 서방백리(중간 완충지대)의 땅을 봉하여 주었다는 위략의 소전이라든지, 또 패수(청천강) 이북의 연령(요동군)은 본시 한씨조선의 구역이었음을 종합하여 보면 만은 순수한 외방민족 계통의 사람이 아니라, 연령내의 토착 조선인 계통의 자손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위만이 도리어 조선인이라고 합니다.(ㅡ.ㅡ) 만일 그가 타율성 이론을 주장하던 사람이었다면, 과연 위만이 조선인이라고 했을까요? 이어서 27쪽에선 위만조선의 패망과 관련해 이병도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당시 슬기로운 조선인의 정치조직과 군사 조직의 진보 발전, 왕성한 민족의식은 물론이요 또한 한의 우세한 철기무기에 대항할 정도의 철기문명의 혜택을 이미 충분히 받았던 것도 알수 있다 하겠다."
56~57쪽
변진제국으로 낙동강방면에 있는 나라 가운데는 중류역의 임나(혹은 대가야국)와 하류의 가라(구야=혹은 가야)가 정치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가장 우월한 지위에 있었던것 같다. 두나라는 전설에 따르면 종지의 관계를 가졌던 것 같고, 명칭으로 보드라도 전자를 대가야 혹은 상가라, 후자를 하가라라 별칭하였다. 두 가라를 중심으로 연맹이 조직되어 육가야 오가야의 칭이 있었으니 전자가 유력하였을때는 그가 맹주노릇을 하고 또 반대로 후자가 유력하였을 때는 후자가 우이를 잡았던 모양이다. (이하 하략)
→만일 이병도가 식민사학자였다면, 가야에 관한 언급들 중에 임나일본부에 관한 얘기는 왜 다 빼먹은건지 잘 모르겠다.
314쪽
명과의 관계
태조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책을 주장하고 또 실행하여 오던터이므로 개국 후에도 그리하여 대대로 소위 사대의 예를 행하여 정기적으로 사절을 파견 예물공물의 증송이 있었지만 그것은 형식상 겸양의 예=동양식 외교방법=내지 공적무역의 의의를 가진 것에 불과하고 실속에 있어서는 모든 정치를 독자적 경지에서 행하여 왔던 것이다.
→사대의 의미가 자주적이라고 평가하는데, 왜 식민사대적 사고를 갖춘 이병도라는 말이 나오는지 의문이다. 이밖에도 많다. 나당전쟁의 강조와, 발해의 한국사귀속 주장 등 그가 도대체 어떤 면에서 식민사관을 따른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조선의 붕당에 대해서는, 식민사학의 당파성이론을 조금이나마 긍정하는 면모를 보여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소위 자칭 "민족주의사학"인지 "재야사학"인지 하는 동네에선 당파성이론, 아니 식민사학 전체적 면모에서 식민사학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나 모르겠다.
실증사학을 도입해서 신화와 역사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단군조선을 부정했다라는 이유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한 것 때문에 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조선사편수회라는 것도 실상은 별로 역사왜곡한 것도 없고, 이병도는 일제시대에도 창씨개명 거부했고, 자식 손자 모두에게 못하게 하며 조선인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말년에 가서는 단군조선의 실체를 인정했다.
마치면서 - 일사학의 제일 큰 문제점은 그들이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황당한 식민사관을 가르치는데 문제점이 있는것이라 생각된다. 사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가치관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데 친일 사학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식민사관을 연구했다는 점에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문제이다. 개인적으로 독립군들은 탄압한 것 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있는 친일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일사학자들은 광복이후 버젓이 서울대학교 초기 창립멤버였거나 한국사학회의 창립 멤버로 활동을 역임을 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해방이후 친일파청산의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것는 예라 할 수 있겠다. 현재는 많이 부분 식민사관을 극복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어느 것이 올바른 역사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식민사관의 문제점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식민사관을 걷어내고 자랑스런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참고문헌
이병도, 《한국사대관》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윈회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강만길,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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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3.10.01
  • 저작시기201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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