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한제국 국권침탈과 조약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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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침탈과 조약강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序言
-신선한 충격, 성립인가 불성립인가? 무엇이 이 논쟁을 이끌었는가?-

<2>. 本言
1. 논문의 저자소개
2. 논문의 내용요약
3. 기존의 연구 성과와의 차이, 논지소개
4. 내용비평
5. 참고문헌

<3>. 結言
-일제 강점에 대한 보상의 문제와 그로 비롯된 조약의 문제를 논하며-

본문내용

자의 논리에는 러시아 편향적인 시각이 너무 강하다. 물론 대한제국의 대외정책이 러시아의 힘을 많이 빌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의도도 일본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전에 이태진씨의 논문 <<고종시대의 재조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국가의 이권의 대부분이 '아관파천' 기에 넘어가며, 당시의 국제적 정세가 지리정치학적 위치에서 대한제국이 상호견제의 각축장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지 순수한 의도로서 일본과 맞섰던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러한 러시아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그 후에 오고 간 미국 공사들이나 개인 고문들도 국왕이 미국에 대한 신뢰감을 쌓기에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필자는 대한제국의 존망이 미국의 손에 있다는 식의 미국편향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물론 논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분명히 미국은 고종이 중국 중심의 구질서에서 벗어나 자주국가의 일원으로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입해 들어가기 위해 체결한 수호통상조약 체결의 첫 번째 상대였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는 대한제국에 대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은 유럽시각에서 볼 때는 그다지 세력이 크지 않은 이른바 '2류 국가'정도로 인식이 되어 있었고 자국내의 발전을 이루는 데도 바쁜 시점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대한제국은 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세력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상태여서 미국이 그렇게까지 대한제국에 대해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또한 거리상의 문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넷째로, 필자는 고종에 대해서도 너무 지나친 절대화적, 영웅화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역시 위와 같은 성격의 비평이지만, 필자에 의하면 고종 황제는 일본의 조약 강제가 명확히 불법임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저항운동을 벌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 운동은 안으로는 항일 전선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밖으로는 프랑스의 법학자 프란시스 레이의 논문으로부터,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였으며, 이는 유엔의 총회에서 무효조약으로 규정되는 것 등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또 고종을 평하기를 외세의 위협에 대항하면서 자주국가의 기틀을 유지하려는 민족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맥락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고종황제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의 활동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태진씨가 보고 있는 고종의 시각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다. 이태진씨의 이 시각은 저번에 비평한 논문 <<고종시대의 재조명>>이라는 논문의 맥락과도 일치한다. 과연 고종을 이렇게나 높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필자는 '乙巳勒約' 에서의 미국의 태도는 단순히 미국 내부의 사정으로만 돌리고 있다.
乙巳勒約 무효화 운동에 대한 미국정부의 태도는 극히 비협조적이었다. 그것은 이 때 들어선 공화당벙부가 대외정책의 기본방향을 바꿈에 따라 일어난 변이의 하나였다. 1880 년대 이후의 미국의 대외정책은 민주당정부와 공화당정부 사이에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후자가 전자에 비해 훨씬 더 침략주의적 대외정책을 폈다. 예컨대 하외이왕국에 대한 정책에서 민주당 출신의 S. G. Cleveland(초임 : 1885~1889, 재임 : 1893~1897)대통령이 강점을 반대한 반면 공화당 출신의 데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1901~1909)은 현지에 진출한 미국인 대지주들의 주장을 지지하여 강점을 단행하였다. 공화당 정부는 스페인 정부 이후 필리핀 점령을 목표로 태평양 진출정책을 적극화하였고, 이에 따라 하와이왕국 점령과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에 대한 견제가 중요한 사항이 되어 대러시아전쟁을 편 일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종의 책임은 없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기존의 학설과 비교 검토하면서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고종에 대한 시각은 너무 지나친 감이 있다. 특히 고종의 무효화 운동으로부터 '乙巳勒約' 의 비합법성이 드러나, 종전 후의 평가에까지 이르렀다는 내용은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그 종전 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으로 일본과 맺었던 협정에서 양국간 관계의 청산을 위한 조약이 벌어졌던 것도 미국의 대외정책의 변화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모든 외교는 미국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필자의 고종에 대한 시각과 논리를 제대로 펴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필자의 고종에 대한 절대화 내지는 편향적인 시각은 너무 그 정도가 지나친 것 같다.
5. 참고문헌(우리가 참고한 것입니다.)
<<일제의 조선 침략과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8년. 국학자료원
<<대한제국의 대외정책>> 현광호 지음. 2002년. 신서원.
<<조선통감부 연구>> 강창양 지음. 1994년. 국학자료원.(교수님과의 면담으로 인하여 자료의 무유용성이 밝혀졌으나, 일단 정황적 참고에는 도움이 약간 되었으므로 기재함.)
<<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 이태진 편저. 2001년. 태학사.(교수님의 말씀대로 가장 주요한 서적으로서 참고함.)
<3>. 結言-일제 강점에 대한 보상의 문제와 그로 비롯된 조약의 문제를 논하며-
저자는 여러 가지의 연구와 서류상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의 병합조약이 성립하지 않는가라는 논지를 지적하고 있다. 이 저자의 논지에 대해서는 반박도 어려울 뿐더러, 반박할 이유도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가 주 참고문헌으로 사용하였던, <<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라는 서적을 보면 저자의 논리와 그에 대한 고증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하겠다.
그러나 저자는 논문을 쓰면서 보상차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히 한 것 같다. 서론에서, 결론에서 약간의 지적과 대책의 제시를 하고는 있지만 모자라다. 이 논쟁의 주된 목적은 병합이 유효냐, 무효냐도 아니요, 병합이 성립하느냐, 아니냐도 아니다. 이 논쟁의 원인은 일본이 한국에 한 행동에 대한 한국의 보상요구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한 보충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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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5.12.02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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