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의복의 역사(개항 ~ 현재) - 개항 후, 일제 시대, 해방 후, 박정희 정권시대, 영 패션시대, 탈 유행시대,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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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사] 의복의 역사(개항 ~ 현재) - 개항 후, 일제 시대, 해방 후, 박정희 정권시대, 영 패션시대, 탈 유행시대, 옷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항 후 (1890 ~ 1910)

2. 일제 시대 (1910 ~ 1945)

3. 해방 후 (1945 ~ 1960)

4. 박정희 정권시대 (1961 ~ 1980)

5. 영 패션시대 (1981 ~ 1990)

6. 탈 유행시대 (1991~2000년)


참고문헌

본문내용

후 (1945 ~ 1960)
광복이 되자 전에 입던 국민복을 벗어버리고, 미국인과 미국에 망명했다가 돌아온 한국인들의 양복을 보고 그대로 입기 시작했다.
1) 남자
(1) 마카오, 슈사인보이
1947년 3월 17일에 인천항에 페리오드호란 무역선 한 척이 입항을 하였다.
이 배는 마카오에서 생고무와 양복지 그리고 신문용지 2천 톤을 싣고 들어 왔는데 이 배가 입항한 이후부터 마카오 무역이니 마카오 신사이니 하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홍콩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사람을 일컬어서 마카오 신사라고 부르고 그리고 이들이 하는 무역을 마카오 무역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이 마카오 신사도 초창기는 이렇게 무역과 관련지어져 불렸지만, 1950년도 이후에는 마카오나 홍콩 등지에서 밀수입해 온 양복지로서 신사복을 지어 입은 사람을 일컬어 흔히 마카오 신사라 불렀고 이는 멋쟁이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이때 슈사인보이가 등장했다. 슈사인보이는 구두닦이로 마카오 신사와 함께 반짝거리는 구두를 연상케 하는 세풍속도의 주인공이 되었다.
(2) 양복점
일본인들이 물러가 숱한 양복점들이 간판을 내달고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양복지가 워낙 귀하고 외국에서 밀수로 흘러들어오는 마카오 양복지의 수량이 한정되어 한 벌씩만 그때그때 끊어다 가게에 진열해 놓고 그것을 감으로 팔기도 하고 맞춤으로 양복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2) 여자
(1) 빌로드 치마
1956년 자유부인 이라는 영화에서 여 주인공이 벨벳으로 만든 한복을 입고 나온 후 양장이나 한복에 벨벳 붐이 일어났다. 벨벳의 속칭‘빌로드’라고 하였으며 한복 외에 원피스 드레스와 코트로까지 인기였는데 특히 한복치마가 유행하여서 혼수 감에도 최고 품목이었다. 그래서 신랑 집에서 색시한테 보낸 함이나 예단에 빌로드가 없으면 매우 불만이었고 ‘얕잡아 본 것’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트집을 잡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벨벳은 홍콩 수입품인데 이렇게 선풍을 일으키자 벨벳 옷감 사용 금지령까지 내려 1인당 한 벌에 3마 이상은 사용할 수 없게 하였다.
(2) 플레어스커트
서큘러스커트(circular skirt)라고도 한다. 허리에서 엉덩이까지는 몸에 맞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자연스럽게 통이 넓어져 밑단이 나팔꽃 모양으로 퍼지는 형태의 치마이다. 퍼지는 모양을 우아하게 만들기 위하여 주로 옷감을 올의 사선 방향으로 바이어스 재단을 한다. 개더스커트(gathered skirt)의 단 부분에도 응용할 수 있는데, 허리 부분에 개더를 넣고 단을 넓게 만든 것을 개더플레어스커트라고 한다.
(3) 맘보 바지
1950년대 말 영화‘사브리나(1954)’에서 여주인공 오드리햅번이 입고나온 이후 크게 유행하였다. 이 바지는 몸에 꼭 끼고 부리가 좁은 길이는 한뼘정도 발목으로 올라오는 짧은 것이다. 엉덩이 부분은 몸에 맞으나 발목 이하 부리쪽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인데 1950년대 말에는 더욱 좁아져 아래통이 15~19cm 까지 되었다. 1957년 맘보바지는 맘보춤과 함께 젊은 세대의 반항심을 표현했던 새로운 시대의 상징물로 등장하였다.
4. 박정희 정권시대 (1961 ~ 1980)
(1) 미니스커트의 등장
1966년에는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길이가 길고 밑이 편안하게 퍼진 베트남 사람의 치마가 유행하여 이를 ‘월남치마’라고 하였다. 이 치마는 시골이나 도시 어디서나 외출복이나 가정용 일상복으로 매우 각광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1965년 서구에서 복식의 혁명을 이루었던 미니스커트가 1967년 미국에서 활동 중이던 가수 윤복희의 귀국과 함께 선풍적인 유행을 일으켰다. 이치마는 치렁치렁 길게 입던 스커트에 비해 간결하고 옷감이 적게드는 경제성은 있으나 노출이 너무 심하여 단속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2) 청바지 열풍
우리나라에는 1970년 중반에 들어와 1970년대 말에는 진 패션의 절정을 이루었다. 실용적이면서 튼튼한 청색진을 선호하여 특히 진바지 생산에서 대호황을 누렸다. 진바지는 젊음의 상징이기도 하여 판초에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매는 것이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과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이었다.
5. 영 패션시대 (1981 ~ 1990)
(1) 유니섹스
전문직 여성들이 생활 전선인 직장을 가짐에 따라 남녀 평등화와 함께 커리어 우먼들은 편한 활동복을 요구하였다. 이렇게 남녀평등주의를 주장하면서 그 실형 방법의 하나로 남성 전용이었던 바지를 여성 정장복으로 삼았다. 특히 바지 착용은 여성 활동을 증가시키고 남녀평등 사상을 더욱 가속화했다.
(2) 유행단축
농촌까지 TV, 방송 등 매스컴과 패션잡지를 통한 시간적인 접촉이 거리와 시간에 관계되지 않게 되어 유행 주기가 단축되었다. 특히 국제 패션 쇼 개최 등 서구 모드를 수용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도 큰 영향을 중 하나였다.
(3) 생활한복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우리 옷 한복을 생활 한복이라는 새로운 유행어로 창조하여 젊은 세대에 의해 디자인되고 시판되기 시작했다. 천연염료, 천연 소재를 사용하여 말 그대로 생활에 편리한 옷을 만들어 냈다.
6. 탈 유행시대 (1991~2000년)
(1) 패션의 다양화
1990년대는 국제패션 시장화로 ‘탈 유행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복고풍이 나오고, 서로 다른 개성이 어우러지면서 속박을 탈피하고 개인의 취향에 맞는 개성시대를 연출하고자 하였다. ‘X세대’ 와 ‘미시족’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출현하고, 대중스타의 패션이 모방되었다.
(2) 진. 힙합. 배꼽티
1992년 여름에는 진바지가 유행하였다. 특히 10대들은 청바지를 일부러 찢거나 구멍을 내어 속살이 보이는 등 매우 불결하고 단정치 못한 옷을 그들의 특권으로 삼았다. 또한 연예인은 젊은이에게 우상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따라서 그들의 행동이나 패션의 모방은 폭발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힙합바지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참고문헌
조효순 저,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전호태 저,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김은정, 임린 저, 역사 속의 우리옷 변천사, 전남대학교출판부 2009
김정호 저, 우리 옷 역사 2000년, 글누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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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28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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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26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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