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본 자료는 6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해당 자료는 6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6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동학의 발생과 발전

2. 농민전쟁의 배경

◆ 봉건체제 파탄과 농민층의 몰락
◆ 제국주의 침탈과 상품경제 침탈
◆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 정치, 사상적 동향
 1) 지배층의 정치 사상적 동향
 2) 민중세력의 정치 사상적 동향

3. 갑오농민전쟁의 성격

◆ 갑오농민전쟁의 정치, 사회 ,경제적 지향

 (1) 정치적 지향
 (2) 경제적 지향
 (3) 사회적 지향

4. 제1차 갑오농민전쟁

◆ 교조 신원 운동
◆ 고부민란
◆ 제1차 농민전쟁

5. 제2차 갑오농민전쟁

◆ 2차 농민전쟁의 봉기 및 경과
◆ 최후의 항전 - 우금치 전투

6. 동학농민 전쟁의 결과 및 의의

7. 참고자료

8. 토론주제와 관련된 내용

◆ 동학의 농민전쟁에서의 역할
◆ 갑오농민운동의 명칭에 대한 문제

본문내용

반 농민이 굳게 결합하도록 하였다.
(2) 종교적 외피론
동학이 농민전쟁에서 집단화의 계기를 마련하고 추진력 제공 등의 역할을 한 것은 인정하나 외피에 불과하다는 종교적 외피론이 있다.
동학은 당시 여러 민간신앙적 요소와 사회사상들을 수용하여 창립된 종교이며 사회사상이었다. 동학은 이 과정에서 해체되고 있던 조선사회의 지향점과 서학에서 보여주는 서구적인 세계를 종합한 새로운 사회로의 전망을 일정하게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전망은 복고적 관점을 수반한 종교적 차원에 머물렀고, 이에 따라 새로운 정치체제 구상이라는 점은 동학 속에 적극적으로 포섭될 필요가 없었으며, 당시 화이적(革夷的) 세계관이 테두리에서 초보적이거나 환상적인 반봉건, 반외세 수준을 보여주는데 그쳤다. 즉 동학은 새로운 사회인 근대사회로의 전망을 보여줄 발전적 역사관과는 거리가 있는 전통적 순화사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나마 그것이라도 실현시켜줄 구체적인 게획, 강령등이 빈약하였다.
또 이런 한계를 극복할 현실적 방안과 실천적 노력 또한 최제우 다음에 존재하지 않았다. 즉 동학이 자연-인간 합일의 조화사상과 천도순화사상 그리고 현실이탈적 신선사상 등을 견지하고 있는한 동학교단은 현실 투쟁보다는 종교적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농민전쟁론
동학사상 그 자체는 어떤 정치경제사회적 실체도 없으며 농민전쟁의 사상은 동학사상과는 이질적이어서 동학이 농민전쟁의 지도 이념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이다. 즉, 농민전쟁이 동학으로부터 포조직을 제공받았고 농민층 동원에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동학과 농민전쟁과는 무관하며 다만 도구적, 기능적으로 활용한 것이었고, 갑오농민전쟁에서 동학교도가 많이 참가한 것은 포교를 공인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일반 농민과 공통의 처지에서 반봉건 반침략을위해서 일어난 것이었다는 것이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동학사상은 유교사상에 불교와 도교를 포함한 것이었다. 농민전쟁의 지도부가 주로 동학접주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반드시 동학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으며, 동학사상보다 19세기에 계속된 농민항쟁 과정을 통해 성장한 민중의식이 농민군 지도부를 통하여 지도 이념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일반 참가 대중들은 종교와 무관한 경우가 더욱 많았을 것이다. 이들은 조선후기 이래 심화된 봉건모순과 개항 이후 제기된 민족모순 속에서 변혁 주체로 성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싸움에 참여하였다. 동학신도들도 종교적인 입장에서 참가한 것이 아니라 일반 농민과 같은 입장에서 일어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학교단은 농민전쟁 이전의 보은 집회에서 이미 동학교단의 지도자 최시형과 서병학은 동학의 집회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했다. 그들은 2차 농민전쟁 때도 반대의 태도를 취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참가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교단쪽에서 만든 조항은 농민군의 요구 조건과 대비되었는데, 특히 농민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세금에 대해 무조건 납부하도록 한다든가 고리대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도록 명령하고 있는 점은 반농민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오히려 투쟁에 소극적인 동학도를 농민군이 공격하기도 하였다.
또한 동학이 본격적으로 포교되기 시작했던 호서호남 지방이 농민전쟁의 진원지가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 혁명의 주도 세력들이 60년대 이래 오래도록 교단을 이끌어왔던 동학 교단 지도자들이 아니라 80년대 말 또는 90년대 초에 부상한 하층지도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1894년 농민 혁명에 있어 동학의 역할은 여러 각도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2.갑오농민운동의 명칭에 대한 문제
과거부터 지금까지 붙여온 이름을 대략 열거하면, 동학난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이다. 여기서의 초점은 반란, 운동, 혁명, 전쟁 가운데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의 문제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불리운 원인은 아직까지 성격규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격을 명확하게 규명하면 용어상의 문제는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다만, 현재는 왕조중심사관에서 이해한 반란으로 보지 않고 있으며, 운동이란 용어도 앞서 지적했던 대로 이 사건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용어로 파악하는 경향이다.
그렇다면 두 개의 용어로 압축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즉 혁명인가 전쟁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연구자들은 상대편으로 기울려고 하지 않는다. 양자 나름대로의 논리가 서있기 때문이다. 혁명편에서는 정권타도와 동학이 내세운 구호의 지향성 쪽에 비중을 두고 있으며, 전쟁편에서는 무력투쟁이라는 외형적 투쟁형태와 계급적 시각에서 피지배계층인 농민세력이 지배세력과 외세에 투쟁한 사실을 부각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양자 모두 이 사건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으나, 양자를 포괄할만한 용어는 아직까지 제시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운동이란 용어가 넓은 의미에서 이 사건을 담아내기에 부족하다기 보다는 적합한 용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독립운동이나 민족해방운동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하등 제기된 이의가 없는데, 여기서는 처절한 무력투쟁으로서의 전쟁과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는 지향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용어로서 운동이 사용되고 있다.
혁명과 전쟁의 개념
‘ 혁명 ’과 ‘ 전쟁 ’은 엄격한 구분없이 부르는 사람들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적절히 사용되어온 것같다.
하지만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사살의 명칭은 그 사실의 성격을 규정짓는 아주 중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적절한 선을 없애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구분선을 확실히 하고자 이 항을 서술하다.
우선 그들의 사전적 개념을 살펴보겠다.
먼저, 혁명의 개념은
①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국가의 기초, 사회의 제도, 경제의 조직을 급격하게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② 이전의 왕통 ( 王統 )을 뒤집고 다른 왕통에 대신하여 통치자가 되는 것.
③ 종래의 관습 . 제도 . 방식을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 ( 質的 )으로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전쟁은 인종 . 부족 . 민족 . 국가 . 정치단체 등과 같은 각종 집단 상호간에 발생하는 무력투쟁을 의미한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13.10.02
  • 저작시기201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410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