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왜 멸망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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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는 왜 멸망 했는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로마는 왜 멸망 했는가



Ⅰ. 로마 개관

Ⅱ. 로마인들의 자연관
 1. 로마의 자연환경
  (1) 로마의 기후
  (2) 로마의 지형
 2. 로마의 신관
 3. 로마의 인간관
 4. 로마의 자연관

Ⅲ. 로마 문명의 영향
 1. 로마 문명
 2. 로마의 계승자들
  (1) 이슬람 문명
  (2) 비잔틴 문명
  (3) 서유럽

Ⅳ. 로마 제국의 멸망 요인
 1. 내부적 요인
  (1)정치적 요인
  (2)경제적 요인
  (3)지리적 요인
  (4)인력의 감소
  (5) 환경적 요인
 2. 외부적 요인

Ⅴ. 결론

본문내용

, 일반 욕탕의 온도는 항상 섭씨 55도를 유지했다. 실험결과 그런 온도를 유지하는데 적어도 매년 114톤의 나무가 필요 한 것으로 증명됐다.
다섯째, 부유한 로마인들이 유리창을 설치하여 호화스런 생활을 즐긴 것도 로마 숲 황폐화에 기여했다. 기원후 1세기 초에 유리를 불어서 만드는 제조법이 발명 되었고, 그 덕에 유리잔은 평민들에게도 보편적으로 퍼졌다. 유리의 대중화는 모래에서 유리를 녹여 추출해내는 유리 산업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결국 엄청난 양의 나무가 연료로서 요구되었다.
여섯째, 호사스러운 건축은 로마제국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형 구조물이 유난히 많은 로마시대에는 건축물을 만들 때 쓰는 석회 콘크리트를 만들기 위해 석회 가마에 불을 지펴야 하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 했다. 로마의 대형 건축물이 하나 생겨날 때마다 로마의 작은 숲은 하나씩 사라져 갔다.
로마는 숲이 파괴 되면서 식생이 차츰차츰 없어졌다. 식생이 없어지면서 용지는 지력확보가 안되서 경지는 점점 부족해지고, 늪지대가 생겨나면서 전염병, 해충문제가 커져 인구가 감소하게 되는 등 큰 문제로 연결되었다.
2. 외부적 요인
로마 멸망의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들 수 있다. 4세기 경 시작 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로마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다. 게르만족이 이동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훈족의 이동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이동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중앙아시아와 극동지방에 있었던 천재지변이었다. 4 세기 초엽부터 5년간 기온이 1도가 내려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에게 생명과도 같은 풀과 농작물이 냉해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인 훈(흉노)족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만주를 거처 중앙아시아 초원을 따라 한반도 깊숙한 본토로부터 대이동을 시작해 만주를 거처 초원을 따라 북상해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훈족의 이동은 격렬했고 그들에게 쫓긴 게르만 족은 생존을 위해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게르만족의 침략과 당시 로마의 정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63년 율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 로마에는 동방에서나 라인, 다뉴브강 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되풀이 되었다. 서부를 통치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3-375)와 그의 동생 발렌스(재위 364-378)의 활약도 소용없이 서부에서는 알라만인이 침입하고, 갈리의 바가브타에란도 격화되었으며, 브리타니아, 파노니아, 북아프리카 등도 어지러웠다.
한편 동부에서는 365년 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376년 흉노에게 쫓긴 서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주할 땅을 찾아 남하하여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 전토를 짓밟고 마침내 발렌스 군대를 괴멸시켰다. 내외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로마는 완전히 군사국가화 하였으나 그 군대는 거의가 야만인으로 구성되었고, 한편 경제활동의 정체는 극도에 달하였다. 고트족은 한때 테오도시우스(재위 379-395)에게 쫓겨났으나 결국 382년의 협정에 따라 제국 영내에 정주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동안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교리논쟁과 종교개혁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 전통적인 제의를 금지, 이단을 억압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제국의 전토를 통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자(395) 제국은 최종적으로 동서로 분리되어 동반부는 아르키디우스, 서반부는 호노리우스가 영유하였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정치의 실권을 게르만인 무장인 스틸리코가 장악하였으나, 그가 처형된 뒤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여 정정은 어지러웠다. 410년에는 알라리크왕이 거느리는 서고트족이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그 뒤 서고트족은 방향을 돌려 에스파냐로 이동하였으며, 역시 게르만인인 반달족은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각각 왕국을 세웠다.
또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도 갈라아에 침입하고, 색슨족은 브리튼섬으로 건너갔다. 한편 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가 서고트와 프랑크의 힘을 빌려 카타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격퇴하였으나(451), 455년 로마시는 반달족에게 약탈당하였다. 그 후에는 게르만인 장군이 로마의 정치적 실권을 쥐었으며, 결국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하여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다(476).
Ⅴ. 결론
이상에서 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가능한 한 무리 지어서 살펴보았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위험하고, 부적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만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고 믿는 학자들은 드물다. 그리고 특정한 한 요소를 강조한다고 해도, 다른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한 학자의 주장을 하나의 틀에 넣고 분류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그리고 특정학자의 강조점이 명확하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요소에 속하는지 분류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연구한 학자들은 자기 시대의 사상이나 시대조류를 그대로 로마 제국의 멸망문제에 투영하곤 했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멸망문제를 연구한 학자들이 대부분은 서구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동로마 제국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근에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특정한 몇 가지의 이론으로 로마의 멸망을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로마의 문명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로마의 멸망을 설명하려는 노력들은 그 자체에 많은 편견과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서로마 제국은 결코 독립적이고 고립된 국가가 아니었고 동로마제국과 서로마 제국사이에는 긴밀한 융화와 협조관계가 있었다. 또한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정착한 게르만족들은 문명의 파괴자가 아니라, 로마문화를 배우려는 도제들이었다. 게르만족들이 이런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로마 문화는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로마인들도 게르만족들을 적대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동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로마제국시대에 게르만족과 로마인들간에 이루어지고 있던 문화의 전파와 변용을 촉진시킨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문제도 이 각도에서 바라보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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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23
  • 저작시기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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