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계 박인로의 생애와 문학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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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노계 박인로의 생애와 문학작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2.노계 박인로의 경제적 배경

3.노계 문학 활동의 특징

4.가사 속에 담긴 노계의 삶과 의식

5.결론

본문내용

즉, 문인으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은거생활에 든 40세 이후로 성현의 경전주석연구에 몰두하였고, 밤중에도 분향축천(焚香祝天)하여 성현의 기상(氣像)을 묵상하기 일쑤여서, 꿈 속에서 성 • 경 • 충 • 효(誠敬忠孝)의 네 글자를 얻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자성(自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여러 도학자들과 고유하였으니, 특히 이덕형(李德馨)과는 의기가 상합하여 수시로 종유하였다. 1601년(선조 34) 이덕형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영천에 이르렀을 때, 초대면에 의해 시조 〈조홍시가(早紅枾歌)〉 등을 지었으며, 1605년(광해군 3) 이덕형이 용진강(龍津江) 사제(莎堤)에 은거하였을 때 그의 빈객이 되어 〈사제곡(莎堤曲)〉 • 〈누항사(陋巷詞)〉를 지었다. 1612년 도산서원에 참례하여 이황(李滉)의 유풍을 흠모하였고, 그밖에도 조지산(曹芝山) • 장여헌(張旅軒) • 정한강(鄭寒岡) • 정임하(鄭林下) • 정연길(鄭延吉) • 최기남(崔起南) 등과 교유하였다. 1630년(인조 8)에는 노인직으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라는 은전(恩典)을 받았으며, 1635년 가사 〈영남가(嶺南歌)〉를 지었고, 이듬해 〈노계가〉를 지었다. 그밖에 가사 〈입암별곡(立巖別曲)〉과 〈소유정가(小有亭歌)〉가 전하는데, 가사가 모두 9편이고 시조는 68수에 이른다. 말년에는 천석(泉石)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다가 1642년에 죽었다. 영양군 남쪽 대랑산(大朗山)에 안장되었으며, 죽은 뒤에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여 1707년(숙종 33) 생장지인 도천리에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워 춘추제향하고 있다.
그는 비록 후반생부터 문인활동을 했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鄭澈)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에 실려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작품들이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비록 그는 시조를 즐겨 지었고 완전히 그것을 생활화하였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 쪽에 더 큰 비중을 두며, 그의 문학적 재능도 그곳에 더 잘 나타나 있다.
그를 격상 시키는 일은 쉬웠으나 그의 문학 작품을 어떤 시각으로 읽어내느냐는 큰 문제로 다가왔다. 그의 가사에 많이 나오는 관념적인 한자어의 과도한 사용, 시어의 함축성이 결여된 산문적인 작품 세계 등을 지적하고 난 뒤에는 가사 내용에 대한 해설적 차원의 접근만 무성 했었다. 그러나 노계 박인로의 독특함은 송강정철과 고산 윤선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 되어야 하고, 박인로 개인의 고뇌와 그것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삶이 보여준 사회 경제적 토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시기 다른 문인들과 달리 어디까지나 한미한 양반으로 그에게는 한 시대의 문제를 높은 위치에서 파악할 만한 지위도 체험도 없었다. 따라서 그의 대한 접근은 그에게서 독자적인 사상이나 언어 표현의 능란함을 찾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산문적인 그의 문학도 당대 문학의 한 영역에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 존재 양상과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의 문학은 삶의 드높은 자유보다는 낮은 차원의 존재 구속성이 어떻게 문학으로 승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는 바, 그는 이런 상황을 솔직하게 문학 속에서 반영함으로써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이룩한 것이다. 그의 삶과 문학을 통해 삶의 사회적 기반과 현실적 빈궁 위에서 강호 자연, 충효 윤리, 안빈낙도가 미학으로 변용되는 양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노계 박인로의 경제적 배경
일찍이 수백 이랑의 밭을 경작하고 있었는데 경계를 침범하는 사람이 있어서 밭이랑을
양보하였다. 젊은 날 귀한 말채찍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길에서 우연히 술에 취한 장부가
채찍을 빼앗아가자 공은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외물에 초탈함이 이와 같을 때가 많았다. 「行狀」
물욕이 없고 큰 아량을 가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위의 기록은 약간의 과장을 짐작하더라도 노계가 젊은 시절에는 말과 밭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옳고 그름을 따져 재산을 지켜야 했음에도 변변한 저항을 못하고 빼앗기고 말았다는 점은 노계의 처지가 향촌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노계의 집안은 점차 향촌에서도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한미한 가문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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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25
  • 저작시기2013.10
  • 파일형식기타(docx)
  • 자료번호#888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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