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최고의 연가戀歌 -강은교
시는 허기진 사람에게만 약동한다 - 박형준
시의 경험 - 박주택
최후진술서 - 이승하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 오탁번
개똥참외론 - 이근배
춤추는 트랙터 - 장인수
<죽순론> - 고두현
마지막 노래 - 김광규
김규동
김기택
숟가락으로 단지 가리기 - 김언희
깨달음의 부력 - 김종길
시가 무어냐고? 김종철
살아 있는 암호 - 김종해
줄타기의 언어 - 김중식
그리움의 소산 - 김후란
스스로의 형벌 - 나태주
나에게 시는 언어 그 자체 - 노향림
절경 - 문인수
시는 건강이다 - 문 정희
박남철
받아적기 - 신 달자
황야의 눈 - 신대철
개결미의 순진한 놀이 - 신현정
詩, 받침 하나가 모자라는 - 유 안 진(시인)
사전과 다른 말 만들기 - 이건청
수액 - 이선영
채워주는것 - 이성부
너무나도 확실한 물증 - 이수익
이승하
시는 없다 - 이승훈
내가 자작나무를 범한 이유 - 이재무(시인)
시는 나다 정일근(시인)
詩는 生成이다. - 정진규
심득(心得)된 말 - 조 정권
채호기
시는 내 삶의 단독정부 - 천양희
최영철
허만하
시는 허기진 사람에게만 약동한다 - 박형준
시의 경험 - 박주택
최후진술서 - 이승하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 오탁번
개똥참외론 - 이근배
춤추는 트랙터 - 장인수
<죽순론> - 고두현
마지막 노래 - 김광규
김규동
김기택
숟가락으로 단지 가리기 - 김언희
깨달음의 부력 - 김종길
시가 무어냐고? 김종철
살아 있는 암호 - 김종해
줄타기의 언어 - 김중식
그리움의 소산 - 김후란
스스로의 형벌 - 나태주
나에게 시는 언어 그 자체 - 노향림
절경 - 문인수
시는 건강이다 - 문 정희
박남철
받아적기 - 신 달자
황야의 눈 - 신대철
개결미의 순진한 놀이 - 신현정
詩, 받침 하나가 모자라는 - 유 안 진(시인)
사전과 다른 말 만들기 - 이건청
수액 - 이선영
채워주는것 - 이성부
너무나도 확실한 물증 - 이수익
이승하
시는 없다 - 이승훈
내가 자작나무를 범한 이유 - 이재무(시인)
시는 나다 정일근(시인)
詩는 生成이다. - 정진규
심득(心得)된 말 - 조 정권
채호기
시는 내 삶의 단독정부 - 천양희
최영철
허만하
본문내용
무지하였다. 이론서도 번역서도 읽지 못했다. 그래서 내 시도 무지하였다. 거들먹거리고 어렵고 요란하고 난해한 시는 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나는 論을 모르기에 論이 없다. 나의 詩眼은 善惡과 美醜를 바르게 보는 것. 나를 설득했다면 나를 감동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나에게 詩는 나다. 나 이상도 나 이하도 아니다. 詩는 生成이다. - 정진규
요즈음 詩는 내게 어제 심은 芍藥 다섯 그루이며, 담장 밖 낮은 언덕에서 녹음이 한창인 夕佳軒 늙은 느티나무의 暮年逢靑春이다. 그가 비워 둔 그의 허공으로 우리 집 뜨락을 기웃대는 아득한 한낮이다. 그의 陰가 진종일 걸려 쓴 文字다. 지식과 경험의 늙은 역사가 질서라는 이름으로 간섭하는 것을 그는 거북해 할 때가 많다. 帝王切開보다는 自然分娩을 절대의 생명 행위로 그는 體化하고 있다. 詩는 몸이다. 가령, 보리타작 끝낸 까끄래기를 태우는 저녁연기와 그 너머 뒷산에서 허드레로 건너오는 뻐꾸기 울음이(※박용래)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처음부터 感應하고 있는 通路가 그에게는 있다. 어떻게 한 몸인가. 和而不同이다. 내게 있어 지금 그 순간은 <‘저물다’의 實物告知요 슬픈 안식>으로 응답하고 있다.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와 저녁연기는 그래서 한 몸이다. 하나는 소리로 다른 하나는 시각으로 서로 感愴하고 있다.
詩는 몸이며 生成이다.
그것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꿈속에서조차 꿈을 꾸는 마침내 이르고자 하는 몸 밖의 몸이다>그 生體다. 感愴의 所産이다. 그러나 정답이라고 단답을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둘도 아니다. 秋史선생 말씀대로 不二禪蘭으로 태어나는 하나의 몸이다. 瘦式의 소산이다.
심득(心得)된 말 - 조 정 권
사유 앞에 언어를 다 드러내는 것은 시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시를 쓰기 전에 나는 마치 벼랑 끝까지 내몰린 심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절벽 앞에 던져진 어떤 메시지를 뛰어 내려가 붙잡을 수도 없고 동시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마음의 상태가 며칠씩 지속되거나 혹은 젖은 성냥처럼 잘 지펴지지 않기도 한다. 나는 지속되는 마음의 상태에 성냥을 긋고 한 줄의 불을 일으킨다. 나는 언어를 사유를 들어내는 수단으로 생각지 않는다. 언어는 시인의 체질을 들어낸다. 내게 언어란 사유 이전이거나 사유 이후에 발생되는 ‘심득(心得)된 말’이다. 시의 첫 구절 혹은 한 문장은 반듯이 이 심득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도록 한다. 나는 땡볕과 같은 언어를 직접 쐬지 않는다. 땡볕이 창호지를 통과해 유순해지듯 그렇게 나는 언어를 ‘심득된 세계’로 조련하려 애쓴다.
채호기
시란 언어적 구성물이다. 동시에 시란 언제나 언어 그 너머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알다시피 시의 이러한 특성은 언어의 본질적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은 언어와 실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언어의 질서’와 ‘언어로 표현될 세계의 질서’는 항상 서로 어긋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시의 힘과 아름다움이 발생하지만 모든 시창작의 난제 또한 이곳에서 생겨난다. 시를 쓸 때 시인은 언어의 질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고는 언어의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질서를 버리고도 시에 도달하는 일, 그 지난한 실현은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몸의 질서, 즉 의식이나 가슴이 아닌 몸의 반사 운동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 언어의 질서를 넘어서는 언어의 완성은 전면적이지 않고, 돌 틈을 파고드는 나무 쐐기처럼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며, 언어의 바깥인 실재에서 오지 않고 언어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시는 내 삶의 단독정부 - 천양희
“나더러 시詩를 설명하라고? 그건 안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야.” 시인 네루다가 한 말이다. 나더러 시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라고? 그건 안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무서운 일이야. 나두 네루다처럼 말해본다.
시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시라면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라고 바꿔 말해보면 어떨까. 나에게 시는 절망이 부양한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다. 그래선지 내 삶에서 시는 단독정부의 수반처럼 무서운 권력을 쥐고 있다. 그 권력은 살아 있는 자로서 나를 늘 질문자의 위치에 서게 하고 각성자의 위치에 서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시의 큰 힘이다.
한 편의 시는 한 세계와 같다는 말은 얼마나 무궁무진한 시의 힘인가. 그 힘으로 시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때 시는 내 자작自作나무이며 내 전 집全集이다.
최영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었으나 말하고 싶어 쉴 새 없이 몸이 들썩였던 것. 무슨 대단한 비의를 품은 듯, 천기를 누설하는 착각에 빠지게도 했던 것. 굳이 쓰려고 하지 않았으나 자기 안의 다른 무엇이 써버리고 말았던 것. 써놓은 것이라도 얼른 감추고 패기처분 해야 했으나 그만 깜박 발설해버린 것. 지면을 어지럽히고 종이를 낭비하고 독자의 시간과 감정을 빼앗은 것. 아무 쓸모없는 짓거리였으나 그러므로 더욱 쓸모 있는 것이라 자위하고 의미를 달아준 것. 나 자신이라도 구제해볼 요량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점 온 세계를 구제하려는 과대망상에 빠졌던 것. 잘해야 허무맹랑한 허무를 덮는 위안거리나 되었을 것. 그 바람에 다른 유용한 것들을 다 놓쳐버린 것. 눈앞에 늘린 수백의 유용을 자진반납하고 단 하나의 무용을 거머쥔 것. 더 잃을 것도 없는 적빈의 열매, 혼자 궁글려보다 허공에 훅 날려버려도 좋을 것. 아무 쓸모없음의 모든 쓸모 있음. (최영철)
허만하
시는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언어실천이다. 시를 발견함으로서 인간은 비로소 다른 짐승과 구별되었다. 시는 자기에 대한 논의를 한발 앞서 있는 언제나 미래이어야 한다. 시는 전달을 바라면서도 대중성을 경멸하는 아름다운 양면성이다. 시는 지속적으로 상투성과 싸움으로서 정신의 싱싱함을 살려내는 미량의 독이다. 시는 그 자신의 코드를 가진다. 시는 평균치의 길을 버리고 택한 편차의 길이다. 시는 마이크를 잡지 않는다. 시는 시 이외의 다른 가치( 정치 권력 또는 유사 이데올로기 )의 앞잡이가 되기를 자각적으로 거부하는 자존의 절벽이다.
요즈음 詩는 내게 어제 심은 芍藥 다섯 그루이며, 담장 밖 낮은 언덕에서 녹음이 한창인 夕佳軒 늙은 느티나무의 暮年逢靑春이다. 그가 비워 둔 그의 허공으로 우리 집 뜨락을 기웃대는 아득한 한낮이다. 그의 陰가 진종일 걸려 쓴 文字다. 지식과 경험의 늙은 역사가 질서라는 이름으로 간섭하는 것을 그는 거북해 할 때가 많다. 帝王切開보다는 自然分娩을 절대의 생명 행위로 그는 體化하고 있다. 詩는 몸이다. 가령, 보리타작 끝낸 까끄래기를 태우는 저녁연기와 그 너머 뒷산에서 허드레로 건너오는 뻐꾸기 울음이(※박용래)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처음부터 感應하고 있는 通路가 그에게는 있다. 어떻게 한 몸인가. 和而不同이다. 내게 있어 지금 그 순간은 <‘저물다’의 實物告知요 슬픈 안식>으로 응답하고 있다.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와 저녁연기는 그래서 한 몸이다. 하나는 소리로 다른 하나는 시각으로 서로 感愴하고 있다.
詩는 몸이며 生成이다.
그것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꿈속에서조차 꿈을 꾸는 마침내 이르고자 하는 몸 밖의 몸이다>그 生體다. 感愴의 所産이다. 그러나 정답이라고 단답을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둘도 아니다. 秋史선생 말씀대로 不二禪蘭으로 태어나는 하나의 몸이다. 瘦式의 소산이다.
심득(心得)된 말 - 조 정 권
사유 앞에 언어를 다 드러내는 것은 시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시를 쓰기 전에 나는 마치 벼랑 끝까지 내몰린 심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절벽 앞에 던져진 어떤 메시지를 뛰어 내려가 붙잡을 수도 없고 동시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마음의 상태가 며칠씩 지속되거나 혹은 젖은 성냥처럼 잘 지펴지지 않기도 한다. 나는 지속되는 마음의 상태에 성냥을 긋고 한 줄의 불을 일으킨다. 나는 언어를 사유를 들어내는 수단으로 생각지 않는다. 언어는 시인의 체질을 들어낸다. 내게 언어란 사유 이전이거나 사유 이후에 발생되는 ‘심득(心得)된 말’이다. 시의 첫 구절 혹은 한 문장은 반듯이 이 심득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도록 한다. 나는 땡볕과 같은 언어를 직접 쐬지 않는다. 땡볕이 창호지를 통과해 유순해지듯 그렇게 나는 언어를 ‘심득된 세계’로 조련하려 애쓴다.
채호기
시란 언어적 구성물이다. 동시에 시란 언제나 언어 그 너머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알다시피 시의 이러한 특성은 언어의 본질적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은 언어와 실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언어의 질서’와 ‘언어로 표현될 세계의 질서’는 항상 서로 어긋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시의 힘과 아름다움이 발생하지만 모든 시창작의 난제 또한 이곳에서 생겨난다. 시를 쓸 때 시인은 언어의 질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고는 언어의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질서를 버리고도 시에 도달하는 일, 그 지난한 실현은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몸의 질서, 즉 의식이나 가슴이 아닌 몸의 반사 운동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 언어의 질서를 넘어서는 언어의 완성은 전면적이지 않고, 돌 틈을 파고드는 나무 쐐기처럼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며, 언어의 바깥인 실재에서 오지 않고 언어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시는 내 삶의 단독정부 - 천양희
“나더러 시詩를 설명하라고? 그건 안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야.” 시인 네루다가 한 말이다. 나더러 시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라고? 그건 안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무서운 일이야. 나두 네루다처럼 말해본다.
시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시라면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라고 바꿔 말해보면 어떨까. 나에게 시는 절망이 부양한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다. 그래선지 내 삶에서 시는 단독정부의 수반처럼 무서운 권력을 쥐고 있다. 그 권력은 살아 있는 자로서 나를 늘 질문자의 위치에 서게 하고 각성자의 위치에 서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시의 큰 힘이다.
한 편의 시는 한 세계와 같다는 말은 얼마나 무궁무진한 시의 힘인가. 그 힘으로 시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때 시는 내 자작自作나무이며 내 전 집全集이다.
최영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었으나 말하고 싶어 쉴 새 없이 몸이 들썩였던 것. 무슨 대단한 비의를 품은 듯, 천기를 누설하는 착각에 빠지게도 했던 것. 굳이 쓰려고 하지 않았으나 자기 안의 다른 무엇이 써버리고 말았던 것. 써놓은 것이라도 얼른 감추고 패기처분 해야 했으나 그만 깜박 발설해버린 것. 지면을 어지럽히고 종이를 낭비하고 독자의 시간과 감정을 빼앗은 것. 아무 쓸모없는 짓거리였으나 그러므로 더욱 쓸모 있는 것이라 자위하고 의미를 달아준 것. 나 자신이라도 구제해볼 요량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점 온 세계를 구제하려는 과대망상에 빠졌던 것. 잘해야 허무맹랑한 허무를 덮는 위안거리나 되었을 것. 그 바람에 다른 유용한 것들을 다 놓쳐버린 것. 눈앞에 늘린 수백의 유용을 자진반납하고 단 하나의 무용을 거머쥔 것. 더 잃을 것도 없는 적빈의 열매, 혼자 궁글려보다 허공에 훅 날려버려도 좋을 것. 아무 쓸모없음의 모든 쓸모 있음. (최영철)
허만하
시는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언어실천이다. 시를 발견함으로서 인간은 비로소 다른 짐승과 구별되었다. 시는 자기에 대한 논의를 한발 앞서 있는 언제나 미래이어야 한다. 시는 전달을 바라면서도 대중성을 경멸하는 아름다운 양면성이다. 시는 지속적으로 상투성과 싸움으로서 정신의 싱싱함을 살려내는 미량의 독이다. 시는 그 자신의 코드를 가진다. 시는 평균치의 길을 버리고 택한 편차의 길이다. 시는 마이크를 잡지 않는다. 시는 시 이외의 다른 가치( 정치 권력 또는 유사 이데올로기 )의 앞잡이가 되기를 자각적으로 거부하는 자존의 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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