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문화]훈민정음 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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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전기 문화]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훈민정음 창제과정의 어려움

Ⅲ. 사료 원문 : 󰡔세종실록󰡕 세종26년 2월 경자 庚子/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Ⅳ. 최만리 등 7인의 반대상소와 그에 대한 평가

Ⅴ. 맺음말(훈민정음 창제의 의의 와 결과)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결정해야한다. 그런데 세자가 언문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이더냐.” 라고 하면서 근친을 앞세운다는 말에 반박하였다.
최만리 등은 계속 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되풀이 했지만, 세종은 반박하며 이들을 타박하고 이들을 하옥 시켰다가 이튿날 석방시켰다. 그러나 선비로서 학문의 근본을 알면서도 사익을 위해 말을 돌린 정창손은 파직 시키고, 말을 바꾼 김문은 그 사유를 국문토록 했다. 결국 김문은 말을 바꾼 죄로 장 100에 징역 3년형에 처해졌다. 다만 장 100대는 벌금으로 대신하게 했다. 이것으로 훈민정음 반포와 관련한 집현전 학사들과 세종의 대치는 끝났다. 세종의 강력한 추진 의사와 학문적 논리, 그리고 언어학자로서의 권위 앞에 최만리 등이 굴복한 셈이다.
최만리 등 같이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정음 제정의 반대 사유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주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국가적 이념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입장에 선 것이다. 사대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세종과 최만리 등이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최만리 등을 사대주의자로 몰아 세우는 것은 역사적 몰이해에서 빚어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은 앞서 보았듯이 『고금운회거요』를 번역하여 한글로 음을 달아 펴 내도록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급작스럽게 운서를 바꾸어 편찬하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를 아느냐 하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바로잡겠느냐고 하였다. 『고금운회거요』에 어떠한 한자음을 붙였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다음 해인 1447년에 간행된 『동국정운』의 한자음과 거의 같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최만리 등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을 바꾸어 중국 운서에 맞추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표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국정운식으로 한자음을 개신하려는 세종의 정책은 실패하였으니 최만리 등의 주장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을 놓고 최만리는 한글 창제의 협력자이며 그 상소는 한글 창제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한자음의 개정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다소의 무리가 있다. 상소문에 분명히 이두만으로 충분한데 굳이 언문을 만들어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서두에서 한글은 지극히 신묘한 것이라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금에 대한 예우의 말이고 또 이 말이 훈민정음의 정인지서에도 그대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만리 등의 말이 아니라 인용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가지는 의의는 최만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으나 사료의 부족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다수이다. 최만리 등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상소를 올림으로써 그 상소의 내용을 통해 간접적이고 부족하게나마 당시에 한글 창제를 둘러 싸고 벌어졌던 여러 사실들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없었다면 1443년 12월조 말미의 훈민정음 창제 기사와 같이 한글 창제 초기의 상황에 대해 극히 소략한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한글의 대한 반대 상소문을 통해 최만리 등은 후대의 한글 연구에 있어 소중한 사료를 남겨 주었다 하겠다.
Ⅵ. 맺음말(훈민정음 창제의 의의 와 결과)
훈민정음 창제 이전까지 우리 나라는 고유 문자가 없어 중국에서 한자를 빌어 쓰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똑같은 글자라도 중국과 우리 나라 사람의 발음이 달라서, 말소리와 글자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많고, 배우기가 어려워 사용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특히 일반 백성들은 한자를 익히기가 어려워 책을 보거나 문서를 작성할 수가 없어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가 없었다. 지배 계층 역시 한자로 쓴 내용을 백성들이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백성들과의 의사 소통이 어려웠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은 우리 말소리에 어울리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게 하였다. 이렇게 훈민정음은 세종 대왕의 독창적인 창안에 의해 창제된 것으로, 그 첫번째 의의는 우리 나라 고유의 글자라는 것이다. 민족 고유의 글자를 가졌다는 것은 그 민족의 문화적 우수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세계에서도 이런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199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 기록 유산" 으로 등록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두번째는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어려운 점을 해결해 주려는 세종이라는 위대한 임금의 애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훈민정음이라는 글자의 우수성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한자와 신라 때부터 써온 이두라는 문자가 있긴 했지만 사용하기 불편하였고, 실제 언어 생활에서는 만분의 일도 의사를 전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아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져서 불과 28자이지만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했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어서 하루 아침, 또는 열흘이면 익힐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말소리와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이 글자를 가지고 적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손쉽게 나타낼 수 있었다. 따라서 사회 전반적으로 백성들의 의식도 발전할 수 있었으며 당시 우리 문화가 더욱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도 한글은 인터넷 환경에서도 그 쓰임새가 아주 편리하여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그 가치가 한층 더 돋보이고 있다.
Ⅶ. 참고문헌
이성무, 『조선왕조사 제1권 건국에서 현종까지』, (주)동방미디어, 1998
박영규,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들녘, 200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주)웅진씽크빅, 2004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주)웅진씽크빅, 2008
디지털 한글 박물관 - http://www.hangeulmuseum.org/
재단법인 한글재단 - http://www.hangul.or.kr/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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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4.05.26
  • 저작시기2014.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19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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