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커피 - 차의 정의와 기원 및 전파, 차의 역사와 다른 나라의 차문화, 커피의 유래와 전파, 다방의 풍속도(시대에 따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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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차와 커피 - 차의 정의와 기원 및 전파, 차의 역사와 다른 나라의 차문화, 커피의 유래와 전파, 다방의 풍속도(시대에 따른 변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차의 정의

3. 차의 기원

4. 차의 전파

5. 차의 역사
(1) 삼국시대
(2) 신라시대
(3) 고려시대
(4) 조선시대
(5) 근대와 현대

6. 다른 나라의 차 문화
(1) 영국
(2) 미국
(3) 인도
(4) 러시아
(5) 터어키
(6) 몽고
(7) 티벳
(8) 모로코
(9) 중국
(10) 미얀마
(11) 일본

7. 커피의 유래

8. 커피의 전파

9. 다방의 풍속도
(1) 일제시대
(2) 30년대 다방
(3) 50~60년대의 다방
(4) 70년대의 다방
(5) 80년대의 다방

10.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각국으로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던 시기는 17세기를 전,후한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 각국이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고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동시에 커피나무를 심기에 적합한 지역들을 발견한 때부터이다.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포루투칼 등의 유럽의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 곳에 커피 묘목을 이식하기 시작하여 커피 벨트라는 오늘날의 커피 생산 지역을 형성시켰다.
한 편 세계 제일의 커피 소비국인 미국에는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로 유럽인들이 행운을 찾기 위해 신대륙으로 몰려오면서 비로소 미국의 커피 역사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커피는 세계 무역 거래중 석유 다음으로 비중이 큰 산업으로, 하루에 40억 잔이 마셔진다 한다.
9. 다방의 풍속도
(1) 일제시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미인계 전략으로 한국 사 교계에 침투한 손탁이란 여자가 공사관 앞에서 정동구락부를 경영하였는데,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한 당구장과 다방으로 각종 다류와 양식을 선보인 곳이다 . 또 한일합방 직후에는 명동에 깃샤톈이 생긴 것으로 보아서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경로도 간과할 수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일부 고위층에 한정된 사람들만이 드나들던 곳으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직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이었다.
(2) 30년대 다방
그러다가 1930대에 들어서 다방은 서울의 명물로 자리잡게 된다. 골목마다 다방이 없는 곳이 없었고, 이름도 처음에는 다방이었다가 다음에는 다실, 찻집으로 불리워졌다. 또, 우리나라에 커피가 등장한 때는 서울에 다방이 생겨났던 시기와 비슷한 무렵이었다. 카폐가 충무로 2가 큰길에 일본의 아카다지점으로 처음 문을 열었고, 같은 동네에 명과라는 다방이 일본 제과점이면 서 홍차나 커피도 함께 팔았는데, 차츰 커피 맛을 찾아 모 여드는 손님 때문에 다방으로 변모하였다. 이 다방이 당시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끌자 그 건넛집에 '금강산'이라는 다방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두 다방은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던 곳이고, 우리나라 사람이경영하는 다방은 동경 미술학교를 졸업한 조각가 이순석이 조선 호텔 건너편에 문을 열었던 낙랑팔러가 최초였다. 이곳은 곧 문학가인 정인택, 이상, 박태원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회 사람들, 화가, 영화인등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장안에 화제를 모았었다. 바로 이 낙랑팔러를 기점으로 서울 곳곳에 다방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유명인사들이 경영하던 다방을 들 면 영화감독 이경손의 '카카튜', 정치가 이기붕의 '올림피아', 문학가이상의 '제비.쓰루.69.무기 다방'등을 꼽을 수 있다.
(3) 50~60년대의 다방
유럽에서 카페라는 존재는 근대문명을 형성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다방도 전쟁의 피난시절과 수복 후의 5,60 연대, 전상의 아픔과 허무에 가슴 비빌 데 없던, 살아남은 젊은 문학 예술 청년들이 모여 앉아 예술적인 모색을 활발히 추구하던 곳이었다. 즉, 제대로 클럽 같은 것을 갖지 못한 문인들은 대개 손쉬운 단골다방을 정해놓고, 한담도 나누고 연락처로 활용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해방 후 많은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다방으로 대표적인 것은 당시 소공동에 자리했던 '플라워'라는 다방이었다. 문인들은 여기서 출판기념회도 갖고 문인모임도 자주 열곤 하였다. 또6.25전쟁 중 부산 피난시절 '밀다원', '금강'등의 다방에는 약속이나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서도 언제나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휴전협정으로 포성이 그친 서울거리는 거의 폐허나 진배없었으나 그 와중에도 다방은 건재했다 한다. 이중 남대문로 2가 문예빌딩에 위치해 있던 '문예 싸롱' 은 문예잡지인 [문예]를 함께 발간하기도 했다. 그 후 1960연대에 들어서면서 명동에 '갈채다방'이 들어선다. 문학을 하는 사람치고 갈채다방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60연대만 해도 이 찻집은 문단의 명물이었다. 이 곳은 젊은 낭만이 꽃피던 음악 감상실 '돌채' 센티멘탈리즘 작가 이봉구씨의 푸념이 구성지던 대포집 '은성'과 더불어 서울 명동의 4대 명소 가운데 하나였다. 갈채 다방이 다른 다방과 판이하게 달랐던 풍경은 카운터 탁자에 언제나 증정본 잡지와 원고 청탁서 그리고 출반기념회 초청장 등이 즐비하게 놓여있어 경제적으로 궁색했던 예술가들에게 언제나 지적인 풍족감을 만끽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다방문화는 명동이 통키타와 청바지문화에 주도권을 넘겨주기 전까지 거의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4) 70년대의 다방
70연대의 대표적인 다방이라면 서울 동수동의 '난다랑'을 들 수 있다. '난다랑'이란 상호는 다방의 원래 이름 '다랑'에 '난'자를 붙인 것으로, 이것은 원두커피를 판매하여 전문 커피숍의 바람을 일으켰던 곳이다. 지금은 커피전문점이라는 말이 그다지 낯설 게 들리지 않을 만큼 대중화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난다랑’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테이블마다 커피 설명서를 붙여 놓고 손님들에게 원두커피에 대한 지식을 알렸던 점과 고객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판다는 경영방침에 따라 군고구마까지 구비해 놓은 점이 크게 어필했던 것이다. 지금은 '난다랑'이라고 하면 통유리로 밝고 확 트인 객장에 소품 하나까지 고급을 지향했던 업소로 고객들을 기억하고 있다. 한편 지나친 고가정책에 대중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5) 80년대의 다방
1980연대 들어서는 어둡고 고전족인 지하의 다방에서 밝고 공개적이며 좀 더 대중적인커피전문점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기존의 다방은 차츰 저조해지는 매출액과 높은 임대료 부담 등으로 거의 지하로 밀려나게 된다.
10. 맺음말
<어울림과 더불어 사는 삶>
차의 정신은 한 인격이 삶에 생기와 빛을 주는 아름다움을 체험하면서 자기 성찰을 통해 얻어내는 조화의 마음이다. 개인적으로는 치우침이 없는 인격의 조화이고 사회적으로는 너 와 나의 어울림이며 더불어 살려하는 상생(相生)의 정신이다. 자연을 통해서는 질서와 이치를 배우고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한다.
참고문헌
한국 차 생활 총서 감승희 엮음 (주)서울출판
우리 차와 건강 운기식 지음 도서출판성림
다경(茶經) 육 우(陸 羽)지음 태평양전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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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5.27
  • 저작시기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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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19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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