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역사] 집과 인간의 관계 및 주거의 기원 (원시, 청동기, 철기, 고조선, 고대 사회, 통일 신라, 고려), 집,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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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건축역사] 집과 인간의 관계 및 주거의 기원 (원시, 청동기, 철기, 고조선, 고대 사회, 통일 신라, 고려), 집, 건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집과 인간의 관계

2. 주거의 기원
 1) 원시
  (1) 구석기 시대
  (2) 신석기 시대
 2) 청동기
 3) 철기
  (1) 움집
  (2) 귀틀집
  (3) 고상주거
 4) 고조선
 5) 고대 사회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6) 통일 신라
 7) 고려

참고문헌

본문내용

규제하는 가사규제가 있었다. "사람은 상하(上下)가 있고 지위는 존비(尊卑)가 있어 명칭과 법식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르다. 그런데 풍속이 점점 각박하고 백성들이 앞 다투어 사치, 호화를 일삼고 다만 외래의 진귀한 것만을 숭상하고 국산품을 저속하다고 싫어하니, 예절이 무너지고 풍속이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옛 법에 따라 엄명을 내리는 것이니 그래도 만일 일부러 범하는 자가 있으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러한 가사규제는 흥덕왕때 골품제에 따른 신분별 규제와 사치를 억제 하기 위해 나타났으며, 이러한 가사규제로 인해 당시 주택의 건축방식과 재로, 부재등을 알수 있고, 또한 건축방식의 고급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가사규제 안에서 신라의 주택은 석조기단과 계단, 초석, 중앙 출입문, 살창 곡선기와지붕인 형태를 이루었고, 주택의 규모는 3칸 정도이었다. 휘장이나 병풍으로 칸막이를 하였고, 문전바닥과 반자시설 침상생활을 하였다.
문헌자료에서는 대부분이 당시의 귀족 또는 특권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주택에 관해 언급되어 있을 뿐이며 일반서민의 주택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농민이나 노동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의 주택은 원시적 기법에 의해 세워 진흙담에 초가집이였고, 난방은 온돌을 사용하였다. 신라시대 토기 가운데는 집 모양으로 된 토기가 많은데 이를 家形土器라하며, 이러한 토기에서는 맞배지붕의 형상과 기와집, 초가집 등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
6) 통일 신라
통일신라의 국력과 문화를 바탕으로 건축술이 발전하였으며 가사(家舍)규제도 헌강왕대(憲康王代)에는 유명무실하여 경주의 일반민가는 대부분 기와지붕을 했다고 한다.
7) 고려
고려시대의 주택은 통일신라기의 뛰어난 건축술의 바탕 위에서 계승, 발전되어 나갔다.12세기 초 송나라의 서긍에 의해 쓰여진《고려도경》의 기록에 의하면 개성의 집들에 대해 '왕성(王城)은 비록 컸으나 자갈 산두둑이 있어 지대가 평평하지 못하고 넓지 못하여 백성들은 지형에 따라 집을 짓되 그 높낮이는 벌집이나 개미굴 모양이었다. 띠를 잘라 지붕을 이어서 겨우 비바람을 피했으며 그 크기는 두 서까래를 넘지 못하였다. 부자집은 기와를 덮었지만 열이면 겨우 하나 둘 있을까 한 정도였다.'고 표현하였다. 이처럼 왕궁은 화려하였지만 민가는 초라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거양식은 온돌과 마룻방 구조가 결합된 형태이다. 다시 말하면 온돌이 더 개발되었다. 마룻방을 겹쳐 일반화된 상태이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을 소개하고 '13세기 이전에 서남조선에 온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했으니 이로서 온돌이 고구려의 하층계급에서 상류계급으로, 북방에서 남방으로 전파되어 고려에 와서는 드디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고 가장 일반적인 주택구조의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탑마다 두 손님이 앉는데 손님이 많이 모이면 탑을 늘려 각기 마주앉는다.”는 기록을 볼 때 탑은 평상과 같고 그 위에 소조(小俎)를 놓고 식사를 하는 좌식 형태의 도구임을 추측하게 한다. 일부 상류계층이나 귀족들의 집에서는 온돌 대신 침상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아 중국의 생활을 본뜬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건물 배치는 고려 태조 때 음양오행설에 따라 산악이 많은 한반도에서 고층건물을 세우는 것은 지기(地氣)가 쇠퇴한다고 믿고서 불사나 궁전 건축을 제외하고는 중츰 이상의 높은 건물은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주택은 거의 평옥(平屋)이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근대까지 전해 내려온다.
- 주거의 내부공간
* 서긍의 고려도경에 기록에 의하면 "침상앞에는 낮은 평상을 놓았는데 삼면에 난간이 둘러있고 각기 비단 보료를 깔았다. 또 큰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편안하기 이를 데가 없어 전혀 이풍(夷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왕이나 귀족계급의 예이고 이로써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뿐이다. 일반 상사람들은 대부분 흙침상[土榻]으로, 땅을 파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 그것은 겨울이 워낙 추우나 솜 등속이 적기 때문이다". 라고 쓰여져 있다.
* 온돌의 사용으로 침실과 아궁이가 분리되었고, 지역적으로 온돌이 확산되었다.
- 주거의 외부공간
* 창호는 분합형식이 아닌 3짝 독립 창호였고, 중간설주를 사용하였다. 양쪽 들어열기 창으로 이루어져있다
* 고려말에는 아산 맹씨 행단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김동욱 저, 한국건축의 역사, 기문당 2013
서영두 저, 한국의 건축 역사, 공간출판사 2004
전봉희, 권용찬 저, 한옥과 한국 주택의 역사, 동녘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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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4.06.21
  • 저작시기2014.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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