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장가 (悼二將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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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도이장가 (悼二將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내용과 형식
2. 작자와 제작경위
3. 장르 귀속 문제
4. 문학사적 의의
5. 임용 기출문제와 예상문제

본문내용

향가나 고려 시가에 드러나는 주술적인 표현 방식, 그리고 동질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가 형식을 모색하는 과도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국가 통치라는 추상적 과제를 문학과 음악을 통하여 구체화함으로써,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문학의 전통도 보여주고 있다.
5. 임용 기출문제와 예상문제
29. <자료>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의 문학적 경향에 대한 서술로 타당한 것은? <2009년>
<자료>
예종 시대에 장구(章句)를 숭상하고 음악을 즐겼다. 그 당시 나의 증조부이신 상서 최약(崔?)이 중서성(中書省)을 드나들면서 임금에게 글을 올렸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옛날 당나라의 문종은 시학사(詩學士)를 두고 싶어 하니 한 재상이 아뢰기를, ‘시인들 중의 대부분은 경박하여 사리분별에 어둡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자문을 받아 정사(政事)를 행하신다면 임금의 총명함을 흐리게 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왕은 마땅히 경술(經術)을 좋아하고 날로 선비들과 더불어 경전과 역사서를 토론하여 정사의 이치를 물으며,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는 데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어찌 아이들같이 문장을 다듬고 아로새기는 일에 힘쓰며, 글이나 짓는 경박한 신하들[詞臣]과 함께 자주 음풍농월함으로써 순수하고 올바른 마음을 잃어버리겠습니까?” 임금은 이 간언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이때 어떤 사신(詞臣)이 틈을 타서 아뢰었다. “저 말을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최약은 시문에 능숙하지 못해서 서로 어울려 글을 짓거나 화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전하께 아뢴 것입니다.” 이에 임금이 노하여 최약을 춘주부사로 좌천시켰다.
-최자, 『보한집』-
① 참신하고 새로운 언어와 내용을 중시하는 신의론(神義論)에 대응해 작품의 전거를 중시하는 용사론(用事論)이 문단에 등장하여 새로운 문풍을 주도하였다.
② ‘글이나 짓는 신하[詞臣]’와 같이 문학의 심미성을 쾌락적 측면에서 추구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영향으로 「한림별곡」, 「죽계별곡」 등이 창작되었다.
③ 「도이장가」와 같은 향가의 잔존 형태가 사라지면서, 유교적 문학관의 대두와 함께 재도론(載道論)이 등장하여 내용 중심의 문학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④ 형식을 중시하고 표현을 정교하게 다듬는 창작 경향을 중시한 당시 문벌귀족들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생각은 고려 후기 신흥사대부들에게 계승되었다.
⑤ 고려 시대 중앙 관료들에게는 시를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시 창작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마와 심성 수양에 힘쓰는 것이 당시의 풍조였다.
[정답 및 해설 - 정답 4번]
<보한집>은 이인로의 <파한집>을 보완하면서 이규보의 문학관을 따른 시화집이다. 당시의 집권자 최우의 종용을 받고 지은 책으로, <파한집>에는 들어 있지 않은 자료를 수록하고 이인로 이후 최자 시대에 이르는 많은 시를 포괄한다. 그러나 <보한집> 또한 단순한 자료집이 아닌 일정한 문학관이 반영된 시화집으로, 최자는 이인로와 이규보의 논쟁을 의식하며 이규보의 노선을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어찌 아이들같이 문장을 다듬고 아로새기는 일에 힘쓰며, 글이나 짓는 경박한 신하들과 함께 자주 음풍농월함으로ㅆ 순수하고 올바른 마음을 잃어버리겠습니까?”에서 드러나듯이 <보한집>은 형식과 표현을 정교하게 다듬는 창작 경향의 당시 문벌 귀족들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이는 고려 후기 신흥사대부들에게 계승되어 도와 학문으로서의 문학적 태도로 이어진다. 표현은 사리를 깨닫게 하는 충격을 주는 데 의의가 있다고 했고,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생각은 부정했다. 그 뒤에는 표현에만 너무 치중해 표절을 하거나 다듬고 꾸미는 데만 열중하는 풍조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최자는 새로운 문학은 유학의 도리에 입각한 것임을 말하고, 신유학에 근접한 생각을 가능한대로 서술해보고자 했던 점이 주목된다. 실제로 최자의 주장은 나중에 신흥 사대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해서 신유학에 입각한 문학 활동을 세차게 전개하게 되었을 때야 이론과 창작 양면에서 발전되고 구체화될 수 있었다. 결국 최자는 이규보가 이룬 바를 계승하고 해설하면서 다음 차례에 나타날 문학운동과 연결시켜주는 구실을 했다고 보아 마땅하다.
1. 다음 작품에 대한 설명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보충자료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主乙完乎白乎
心聞際天乙及昆
魂是去賜矣中
三烏賜敎職麻又欲
望彌阿里刺
及彼可二功臣良久乃
直隱跡烏
隱現乎賜丁
님을 올오온
믄 하늘 밋곤
넉시가
사샨 벼슬마 져
라며 아리라
그 긔 두 공신여
오라나 고
자최 나토샨뎌
- 양주동 해독, 「도이장가」
① 향찰로 표기된 신라시대 향가라는 점에서,「삼국유사」에 함께 실린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볼 수 있다.
② 4구체 향가를 연첩한 8구체 향가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보면, 비슷한 형태인 신라「처용가」와 비교해볼 수 있다.
③ 예종이 공신을 추모하며 그 후손을 포상하고, 이를 작품화하여 먼저 지은 한시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해를 도울 수 있다.
④ 찬양하는 말로써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본받자는 노래라는 점에서 「찬기파랑가」와 비교해볼 수 있다.
⑤ 향가의 잔존 형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작품으로 정서의 <정과정곡>과 비교해볼 수 있다.
[정답 및 해설 - 정답 1번]
이 작품은 고려시대 1120년에 지어진 것으로, 「평산신씨고려태사장절공유사」에 제작동기와 함께 실려 있다. 그밖의 창작경위에 관해서는 <고려사>권 14, <명신행적>, <대동운부군옥> 등에 간략하게나마 실려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작품이 신라시대에 지어졌으며 「삼국유사」에 실렸다는 설명은 틀린 것이다.
※ 참고문헌
김기탁, 「도이장가에 대하여」,한민족어문학, 1982
이석우, <羅末麗初의 詩文學 硏究>, 語文論叢 권12, 1996, 淸州大學校
정병헌, 「<悼二將歌>의 製作 經緯와 文學史的 意義」, 한국고전시가작품론1, 집문당, 1992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1992
조윤제, <조선시가사강>, 을유문화사,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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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4.07.11
  • 저작시기2014.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8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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