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연습] 지방세력의 기반 [신라 촌주층 직제, 나말여초 호족층의 관반 존재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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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중세사연습] 지방세력의 기반 [신라 촌주층 직제, 나말여초 호족층의 관반 존재양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지방 세력의 기반
 1. 신라 촌주층의 직제와 나말여초 호족층의 관반의 존재양태
  ⑴ 신라 촌주층의 직제
  ⑵ 호족층의 관반
 2. 경제적 기반
  ⑴ 지방세력
   ① 호족의 성격변화
   ② 지방 세력의 경제적 기반
    ⅰ) 지방토착세력의 경제적 기반
    ⅱ) 지방관세력의 경제적 기반
   ③ 호족의 영역 지배와 그 경제적 기반
   ④ 국가 통제와 호족의 경제적 기반
    ⅰ) 역분전제 실시의 기초
    ⅱ) 역분전제와 호족의 경제적 기반
  ⑵ 해상세력
   ① 개성 지방의 지리적 조건
    ⅰ) 위치상의 요충
    ⅱ) 교통망의 발달
   ② 개성 지방의 역사적 배경
   ③ 왕건선세를 기반으로 한 해상세력의 기반
   ④ 왕건의 수군활동
 3. 지식적 기반
  ⑴ 지방지식인
  ⑵ 지방지식인의 성장 배경
  ⑶ 지방지식인의 성격
  ⑷ 호족과 결합한 지방지식인의 활동

Ⅲ. 맺음말

본문내용

수 있었던 힘은 농업 경제력의 성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겠으나, 보다 직접적으로 작용한 힘은 중국과의 해상무역 또는 해안이나 강을 통한 국내의 교역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던 상업 자본에 기반을 둔, 보다 집중화되고 거대한 경제적 능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下代 末에 중국과의 교통과 무역에 힘을 쏟고 있던 해안의 세력가들은 중국과의 통로를 중앙정부에 의존하지 않고도 교통이 가능하였으며 따라서 중국의 선진문물과 사상의 수용이 반드시 중앙귀족이나 六頭品 知識人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下代 지방사회에서 활발한 대중국 교통의 성행을 통하여 지방인들의 도당수학의 기회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으며 私貿易에 종사하는 商船등을 이용해서 중국에 건너가 지적수련을 쌓고 돌아올 수 있었다.
⑶ 地方知識人의 性格
이들은 중앙의 六頭品과는 다르게 신라하대에서 고려에 이르는 동안에 골품제도에 대한 반발의 단계를 넘어서 호족과 결탁하여 신라의 존립자체를 부정한다. 골품제도는 어디까지나 중앙경주인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제도였다. 이에 그들은 골품제도를 대처 할 수 있는 새로운 인사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신분에 의한 인재등용이 아닌 연령과 경륜 그리고 개인의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제시하고 있으며 고려가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나아가는데 초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신라의 지방사회, 특히 서북지역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던 나말의 지방출신 文士層은 궁예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궁예의 미륵신앙이나 관심법 같은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한 비합리적 통치에 실망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가담한다. 이들은 관료사회의 정비와 통일전의 수행에 공을 세우고 개국공신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지방의 학문적 역량이 통일과 함께 확산된 고려의 정치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미흡한 면이 있었다.
태조의 건국 이후 고려의 문신관료층은 각지의 뛰어난 인재들이 수용되면서 질적 양적으로 확산을 이루게 되는데 궁예정부 출신의 문사들이 개국에 참여한 공로와 지방사회에서 호족적 기반을 가졌음에 비하여 이들은 자신의 학문과 능력을 통한 국가와 왕실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자신들의 입지와 지위를 확보해야 하였다.
⑷ 豪族과 결합한 地方知識人의 활동
나말의 지방사회에서 성장하였던 문사들은 중앙으로의 진출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지방관부에 참여하거나 지방세력가와 결합하여 활동하다가 정부체제를 갖춘 대세력의 등장으로 이에 흡수되었다.
지방지식인은 9세기의 은자적이고 현실도피적인 태도와는 달리 10세기에는 9세기말부터 차츰 성장하고 있었던 지방세력이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자 이들과 결탁하여 호족에게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사상적 기반을 확립해 주었으며 이와 함께 새로운 통치질서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호족의 군사적, 행정적 보좌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예법의 규정과 함께 제사체계를 세워주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사료 몇 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初仕弓裔爲員外遷至東宮記室 見裔政亂乃出家隱於山谷閒聞太祖卽位來見太祖以禮待之謂曰 致理之道惟在求賢(高麗史 92,王儒)
→ 처음에는 궁예에게서 벼슬하여 員外 되었고 東宮記室까지 올라갔다. 궁예의 정치가 혼란하여진 것을 보고 이어 가정을 떠나 산골짜기에 은거하였다가 太祖가 즉위하였다 는 소식을 듣고 찾아 와서 현신하니 太祖가 그를 예로써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좋은 정치를 하는 길은 어진 사람을 구하는데 있는바~
왕유는 처음에 궁예 휘하에 있다가 궁예정치가 문란해지자 은거해 버렸다가 왕건 즉 위 후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이때 태조가 「致理之道」는 오직 현인을 구하는데 달려 있다고 하였는데 [致理之道]는 백성을 통치하는 바른 길로 해석된다. 여기서 현인이 필요하다는 것은 현인이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바른 길이란 왕건의 통치이념을 합리화 시켜 줄 수 있기 때문에 지방지식인인 왕유가 환영 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 최지몽에 관한 사료를 보면 왕유, 최지몽 등은 신라의 수도 경주와는 멀리 떨어진 광해주(순천), 남해영암군(영암) 출신들이다. 이들이 각기 5經, 經史<>史에 능통하고 밝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학문을 닦고 익힌 것은 자신들의 출신지역에서 였을 것이다. 이렇게 지방에서 학문을 수학한 까닭에 이들을 지방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太祖聞其名召使占夢得吉兆曰 必將統御三韓 太祖喜改今名賜錦衣授供奉職常從征伐不離左右 統合之後侍禁中備顧問(高麗史 92, 崔知夢)
→ 태조가 그의 명성을 듣고 불러서 꿈을 해석하게 하였더니 길조를 얻었다. 그리고 설 명하기를 “반드시 앞으로 삼한을 통어하게 되시리다.”라고 하니 태조가 기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게 하고 비단옷을 주고 供奉職에 임명하였으며 항상 종군하여 태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삼한을 통일한 후에는 궁중에서 왕을 모시었고 왕의 자 문에 응하고 있었다.
太祖는 後三國의 통일전쟁시 꿈 해몽으로 유명했던 최지몽을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는데 최지몽이 꿈 해몽을 잘 했다는 것은 전술적인 지략이 풍부하였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지략으로 태조의 통일전쟁에 군사적인 보좌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Ⅲ. 맺음말
지금까지 羅末麗初 사회의 지배 세력이었던 지방 세력의 기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羅末麗初의 豪族層의 官班形成의 경험은 종래 骨品體制가 소멸되는 이 시기에 그에 대치될 수 있는 官班體制를 도출하는 것으로 그것은 당시 사회변동과 지배이념의 변동의 기저 위에 그를 집약하는 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官班體制는 高麗社會의 발전에 있어서 한 기초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 중앙정부와의 관련하에서의 호족의 경제적 기반을 고찰함으로써 호족의 시대적 성격을 파악하였으며, 아울러 호족이 국가 통제 하에 편입되는 과정을 단편적으로나마 제시할 수 있었다. 특히 경제력을 토대로 하는 개성 지방의 세력은 왕건의 수군활동을 뒷받침함으로써 후에 고려건국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나말여초 지방세력은 그들의 독자적인 官班 운영, 경제적·지식적 기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나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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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8.24
  • 저작시기2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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