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 약사 - 선교사들의 내한과 주요 활동, 1900년대의 한국 교회, 1930년대의 한국 교회, 1940년대의 한국 교회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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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개신교 약사 - 선교사들의 내한과 주요 활동, 1900년대의 한국 교회, 1930년대의 한국 교회, 1940년대의 한국 교회 (기독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선교사들의 내한과 주요 활동

2. 1900년대의 한국 교회
 1) 평양신학교 설립
 2) 대부흥과 독노회 조직
 3)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결성

3. 1930년대의 한국 교회
 1) 신사참배 강요와 교회의 굴복
 2) 평양신학교 휴교
 3) 조선신학교 설립

4. 1940년대의 한국 교회
 1) 8.15해방과 교회 재건운동
 2) 교회 개혁의 방법론
  a. 이기선과 혁신복구파
  b. 김린희와 재건파
  c. 현실파
 3) 고려신학교 설립

5. 요약 및 평가

본문내용

에 들어가서 혁신 재건해야 한다고 했으나, 김린희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는 기성 교회는 이미 사단회(마귀회)가 되었으니 들어갈 수 없고 나와서 하나하나 끌어내어 새교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둘째, 이기선 목사나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하던 성전이라도 수리해서 다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재건교회 지도자인 김린희 전도사는 마귀를 섬기던 곳이라 하여 사용할 수 없다고 하면서 새성전을 건축 사용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셋째, 이기선 목사나 한상동 목사는 기성 교회 성도들과 성도의 교제를 할 수 있다고 했으나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기성 교회 성도들과 교제하게 되면 신앙사상과 노선이 희미해지기 쉽고 나아가서는 동참죄가 된다고 하여 절교를 주장했다.
c. 현실파
출옥 성도들에 의해서 교회 재건의 기본원칙이 발표되었을 때 교권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하며,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밖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즉, 양심에 관한 문제이므로 교회의 공적 회개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중심 불범설”을 주장하여, 사람은 육과 영이 있어서 육신은 죽으면 흙이 될 것인데 천한 육신이 범죄한 것까지 귀중한 영혼이 책임질 수 없으므로 영혼만 죄짓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하였다.
3) 고려신학교 설립
조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입각한 교육은 평소 보수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보수계 교계 지도자들의 행보를 재촉했다. 이에 한상동, 박윤선, 주남선, 손양원 목사 등은 1946년 5월 20일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하여 6월 23일부터 8월 23일까지 약 2개월간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였다. 신학교 설립 기성회는 7월 9일 경남노회 제47회 임시노회에 신학교 신설의 인허와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경남노회는 이를 받아들여 신학교 시설을 승인하고 학생 추천과 지원도 약속했다. 이에 따라 1946년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교장 서리로 모시고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으며, 다음 해인 1947년 9월 20일에는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10월 14일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고려신학교의 설립이념은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그대로 가르치며, 또 장로회 원본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교리대로 교리와 신학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 생활의 순결과 순교적 이념을 가진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들은 이 신학교가 평양신학교의 신학적인 전통을 이어가기를 원했지만, 어느 기간 동안 총회의 직영 신학교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난날 배교한 친일 교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현재 총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총회의 직영이 되면 바라는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5. 요약 및 평가
1832년 귀츨라프가 우리나라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첫 발을 내디딘 후 알렌, 언더우드 등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복음의 씨를 뿌렸다. 초기 선교사들은 보수적인 신학을 바탕으로 1905년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그들이 뿌린 복음의 씨를 받은 이들이 이 학교에 입학하여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적 지도자들로 양성되었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교회로 특징을 이루면서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사경회와 새벽기도로부터 시작된 대부흥이 일어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그로 인하여 1907년에는 독노회가 조직되었고 1912년에는 드디어 총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 하에서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였고 많은 이들이 순교하고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신앙을 지켰으나, 교회는 결국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며 굴복하고 말았다. 이후 총회는 일본의 허수아비가 되었으며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역자들은 더욱 핍박을 받았다.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된 후 평양신학교는 이를 성토하며 신사 불참배 운동을 준비하다가 무기 휴교당해 폐교되고 말았다. 이에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이들이 중심 되어 조선신학교를 개교하였고, 이 학교는 그 후 1946년 남부총회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정되었다.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성도들은 교회 재건 운동을 펼쳤으나 친일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에 이기선 목사는 독노회를 조직하여 교회의 혁신복구를 주장하였으며, 김린희 전도사를 비롯한 재건파는 재건교회를 형성하였다.
한편,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에 입각한 교육에 위험을 느낀 한상동 목사 등은 경남노회의 승인과 지원을 받아 1946년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후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명실공히 평양신학교의 신학 전통을 이어가는 학교가 되었다.
첫 선교사 내한부터 해방 직후까지의 시기를 돌아볼 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들이 있다. 첫째, 일제 하에서 교회가 공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이에 대한 신앙적인 해결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1946년 남부총회에서 제27회 총회의 결정을 취소하였지만, 이것은 신앙 양심적인 결정이 전혀 아니었다. 총회가 과거 역사에 대한 교회 차원의 신앙 양심적 접근을 원했다면 배교한 사실에 대한 공적인 참회를 통하여 교회의 개혁과 재건에 임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을 주도하던 보수적 신앙의 지도자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인하여 망명, 투옥된 사이에 자유주의 신학이 몇 몇 신학자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사상을 지닌 목사들이 점차 증가되자, 이후의 장로교회는 신학적인 논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확산됨에 따라, 교회는 보수 신학을 견지하는 진영과 자유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진영으로 점차 분리되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양 진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두드러진 차이를 드러냈으며, 실제 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아주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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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10.07
  • 저작시기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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