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문화신학자로서의 틸리히
2. 틸리히의 신율의 관점에서 바라본 종교와 문화의 상호관계
3. 틸리히의 신율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
4. 신율의 관점에서 바라본 교회
5. 신율의 기준: 개신교원리와 카톨릭실체
2. 틸리히의 신율의 관점에서 바라본 종교와 문화의 상호관계
3. 틸리히의 신율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
4. 신율의 관점에서 바라본 교회
5. 신율의 기준: 개신교원리와 카톨릭실체
본문내용
자기절대화를 모두 배격하며 문제시 삼는다. 즉, 인식론적이나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개신교원리는 인간이 전통적으로 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명한 사실들, 심지어 신앙의 내용들까지도 비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자기비판적 원리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개신교원리는 고대 예언자 정신이나, 위디오니시우스 (PseudoDionysius)적인 부정의 방법 (via negativa)과, 그리고 오늘 날 폴 리꾀르 (Paul Ricouer)가 말하는 의심의 해석학 (a hermeneutics of suspicion)과도 상당부분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개신교원리가 결코 자율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틸리히가 말하는 것처럼 개신교원리가 배격하는 것은 형식으로서의 종교나 문화에 내재하는 가치가 아니라 종교와 문화의 영역에서 주장되는 궁극적이고 배타적인 자기 절대화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신교원리는 종교의 양면성, 종교의 세속화, 종교적 악마화에 대한 승리의 표현이요 또한 영적현존 (Spiritual Presence)에 의한 종교극복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신교원리는 비극적이고 악마적인 종교의 자기 높임에 저항하며, 종교를 인간의 자기 만족과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것으로부터 종교를 해방하며, 궁극적인 것에 저항하는 자기폐쇄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물론 개신교원리가 비록 “개신교 (Protestant)”라는 특정한 집단을 지시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이 원리는 결코 특정한 집단의 원리나 용어로 해석될 수 없다. 틸리히는 묻는다. “개신교원리는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누가 개신교원리를 선포하는가?” 틸리히의 대답은 개신교원리는 어디에서나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개신교원리를 우선적으로 개신교교회 공동체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개신교원리를 종교개혁의 전통하의 교회나 더욱이 총체적 교회의 범위 안에서도 구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존재의 힘이 드러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경계선상의 상황이 선포되는 곳은 어디에서나, “예”와 “아니요”가 선포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우리는 개신교원리를 찾을 수 있고 그 원리를 선포하는 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원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있지 않다. 이 원리는 모든 교회에 의하여 무시되어지고 외면당하여지지만, 또한 모든 교회 안에서 세속화와 악마화의 위험에 저항하는 힘으로 현존한다. 영적 공동체의 표현이요, 원리인 개신교원리는 모든 개별교회를 넘어 영적 공동체가 있는 곳이면 그 어디에나 현존한다. 그것은 궁극적 근원에 의하여 실재가 해석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궁극적인 의미가 자율적인 형식들에 의해 의미가 전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실재하며 그 힘을 가진다.
때때로 틸리히가 성례전적 원리 (Sacramental Principle)이라고도 부르는 카톨릭실체은 모든 존재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의 영적현존을 뜻하는 개념이다. 카톨릭실체은 모든 인간, 장소, 그리고 사물이 신적 영의 힘과 현존을 매개하는 상징이나 성례전이 될 수 있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틸리히에 있어서 종교개혁은 중세 성례전적인 사고의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또 은혜를 강조하는 예언자적 정신을 드러내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성례전주의 (Sacramentalism)나 상징주의 (Symbolism)의 기초를 신앙의 본질로부터 제거해버리는 잘못을 범하였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성례전주의나 상징주의는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측면이다. 성례전적인 측면이나 상징적인 측면을 신앙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상에서 성례전적인 상징인 가시적교회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틸리히가 카톨릭실체이라고 부르는 원리는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즉, 역사상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나 형식들은, 만일 그것이 궁극적인 근원이나 원천인 존재의 힘을 지시하는 한, 신적인 것의 현존을 나타낼 수 있는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비판적 원리인 개신교원리는 모든 유한한 것이 또한 무한함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카톨릭실체과 분리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개신교의 예언자 원리와 카톨릭의 성례전 원리 사이에는 어떠한 충돌이나 마찰이 있을 수 없다. 각각의 원리들은 다른 원리의 도움 없이는 마성적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신율은 이 두 가지 원리의 창조적인 상호종합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현대의 신학은 종교개혁이 종교적인 수확일 뿐 아니라, 또 종교적인 손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비록 나의 체계가 개신교원리를 강조하여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모든 체계 중 가장 긴 교회에 관한 체계가 말하여주는 것처럼, 카톨릭실체에 결합되어야 한다는 요청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관계에는 가능성이 충만한 하나의 카이로스 (a kairos)가 존재한다… 그것(개신교원리)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카톨릭 본질을 필요로 하며, 영적 현존의 구체적인 형상화를 필요로 한다. 또한 개신교원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형상화의 악마화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요약하자면, 틸리히는 개신교원리에 의거하여 모든 우상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존재 그자체 (Beingitself)”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어떠한 것도 현존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틸리히는 모든 자연주의적 사고에 대항한다. 왜냐하면 자연주의적 사고는 창조의 타락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실존의 무의미성 (meaninglessness)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틸리히는 카톨릭실체에 의거하여 모든 초자연주의적 사고에 저항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고는 창조 안의 로고스 (logos)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모든 창조물의 자기구원적인 시도와 자기 높임에 저항함과 동시에, 또한 모든 창조물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려는 시도들을 배격한다. 이러한 개신교원리와 카톨릭본질의 창조적인 일치는 바로 틸리히에게 있어서 신율의 다른 이름이며 참 문화신학이 걸어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물론 개신교원리가 비록 “개신교 (Protestant)”라는 특정한 집단을 지시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이 원리는 결코 특정한 집단의 원리나 용어로 해석될 수 없다. 틸리히는 묻는다. “개신교원리는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누가 개신교원리를 선포하는가?” 틸리히의 대답은 개신교원리는 어디에서나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개신교원리를 우선적으로 개신교교회 공동체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개신교원리를 종교개혁의 전통하의 교회나 더욱이 총체적 교회의 범위 안에서도 구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존재의 힘이 드러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경계선상의 상황이 선포되는 곳은 어디에서나, “예”와 “아니요”가 선포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우리는 개신교원리를 찾을 수 있고 그 원리를 선포하는 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원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있지 않다. 이 원리는 모든 교회에 의하여 무시되어지고 외면당하여지지만, 또한 모든 교회 안에서 세속화와 악마화의 위험에 저항하는 힘으로 현존한다. 영적 공동체의 표현이요, 원리인 개신교원리는 모든 개별교회를 넘어 영적 공동체가 있는 곳이면 그 어디에나 현존한다. 그것은 궁극적 근원에 의하여 실재가 해석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궁극적인 의미가 자율적인 형식들에 의해 의미가 전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실재하며 그 힘을 가진다.
때때로 틸리히가 성례전적 원리 (Sacramental Principle)이라고도 부르는 카톨릭실체은 모든 존재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의 영적현존을 뜻하는 개념이다. 카톨릭실체은 모든 인간, 장소, 그리고 사물이 신적 영의 힘과 현존을 매개하는 상징이나 성례전이 될 수 있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틸리히에 있어서 종교개혁은 중세 성례전적인 사고의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또 은혜를 강조하는 예언자적 정신을 드러내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성례전주의 (Sacramentalism)나 상징주의 (Symbolism)의 기초를 신앙의 본질로부터 제거해버리는 잘못을 범하였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성례전주의나 상징주의는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측면이다. 성례전적인 측면이나 상징적인 측면을 신앙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상에서 성례전적인 상징인 가시적교회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틸리히가 카톨릭실체이라고 부르는 원리는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즉, 역사상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나 형식들은, 만일 그것이 궁극적인 근원이나 원천인 존재의 힘을 지시하는 한, 신적인 것의 현존을 나타낼 수 있는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비판적 원리인 개신교원리는 모든 유한한 것이 또한 무한함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카톨릭실체과 분리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개신교의 예언자 원리와 카톨릭의 성례전 원리 사이에는 어떠한 충돌이나 마찰이 있을 수 없다. 각각의 원리들은 다른 원리의 도움 없이는 마성적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신율은 이 두 가지 원리의 창조적인 상호종합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현대의 신학은 종교개혁이 종교적인 수확일 뿐 아니라, 또 종교적인 손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비록 나의 체계가 개신교원리를 강조하여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모든 체계 중 가장 긴 교회에 관한 체계가 말하여주는 것처럼, 카톨릭실체에 결합되어야 한다는 요청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관계에는 가능성이 충만한 하나의 카이로스 (a kairos)가 존재한다… 그것(개신교원리)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카톨릭 본질을 필요로 하며, 영적 현존의 구체적인 형상화를 필요로 한다. 또한 개신교원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형상화의 악마화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요약하자면, 틸리히는 개신교원리에 의거하여 모든 우상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존재 그자체 (Beingitself)”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어떠한 것도 현존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틸리히는 모든 자연주의적 사고에 대항한다. 왜냐하면 자연주의적 사고는 창조의 타락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실존의 무의미성 (meaninglessness)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틸리히는 카톨릭실체에 의거하여 모든 초자연주의적 사고에 저항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고는 창조 안의 로고스 (logos)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모든 창조물의 자기구원적인 시도와 자기 높임에 저항함과 동시에, 또한 모든 창조물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려는 시도들을 배격한다. 이러한 개신교원리와 카톨릭본질의 창조적인 일치는 바로 틸리히에게 있어서 신율의 다른 이름이며 참 문화신학이 걸어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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