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식생활문화의 변천과정(우리나라 식생활문화 발전과정, 역사, 발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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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식생활문화의 변천과정(우리나라 식생활문화 발전과정, 역사, 발달과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한국 식생활 문화의 변천과정

1. 선사시대
2. 구석기 시대
3. 신석기 시대
4. 부족국가시대의 식생활
5. 삼국시대
6. 통일신라시대
7. 고려시대의 식생활
8. 조선시대의 식생활
1) 유교와 가부장제의 영향
2) 농업과 수산업의 발전
9. 근대와 현대의 식생활
10. 개화기의 식생활
11. 일제시대의 식생활
12. 해방 후~1960년대의 식생활
13. 1970년대 이후의 식생활

* 참고문헌

본문내용

수 있게 되었으며, 80년도 이후에는 경제성장, 여성취업증가, 핵가족화, 레저문화의 확산 등에 따라 음식이 더 이상 배고픔을 충족하고 생명유지를 위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음식을 통하여 다양한 맛과 경험을 즐기고 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사회적 요구가 크게 늘고 있다.
10. 개화기의 식생활
개화기에 일어난 식생활의 변화는 청, 일, 러시아 등 외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외국의 식문화가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외국의 식문화가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진압을 위해 투입됐던 청나라에 군대에 의해 '청요리'가 알려지게 된 것이 시초였다. 그 후 외국과 수교가 본격화되며 일본과 서양의 요리가 국내에 소개됐다.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처형이던 손탁은 민비와 친분을 맺어 궁중에 서양요리를 보급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손탁 호텔을 경영하면서 상류사회에 서양음식을 보급하기도 하였다. 주미공사였던 이하영과 통역관이었던 이채연도 서양요리를 받아들여 퍼뜨린 사람으로 주목된다. 그 외에 서양 선교사들이나 서울에 있던 외국어 학교도 서양요리를 보급하는데 한 음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0년 국내 최초로 [선영대죠서양료리법]이라는 서양요리책이 경성 부인회편으로 발간되었다.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궁에서 음식관리를 담당하던 궁인들에 의해 전문요정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수랏간 내인으로 있었던 안순환이 명월관이라는 궁중요리 전문점을 내는 것을 시초로 일제 총독부 관료와 친일파 부자들을 상대로 한 고급요릿집이 날로 번성해갔다. 이는 프랑스에서 시민혁명 후 왕과 귀족에 속해 있던 요리장들에 의해 전문 레스토랑들이 생겨나게 된 배경과 흡사하다. 1885년을 전후로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의 만민평등사상이 확산되면서 이전까지 반상(班常)의 구별이나 남녀, 장유(長幼)의 구별에 의해 따로 먹던 식사방식에서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한상에서 같이 먹는 방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11. 일제시대의 식생활
1910년대 일본의 토지조사사업 이후 소작권마저 상실한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면서 20년대 우리나라는 급격한 도시의 팽창을 경험하게 되었다. 도시화는 가내생산을 통한 자급자족형 식생활을 식품을 구매하거나 외식을 하는 형태로 변모시키게 되었다. 일제시대 외식문화의 특징은 양극화로 요약된다. 친일파들의 밀실정치 장소가 되었던 고급 요릿집은 번성을 누린 반면 장터를 중심으로 싼 값에 음식을 파는 주막들은 그 저렴함에도 불구하고 영세성을 면치 못하였다. 당시 도시지역 노동자의 대부분은 부자 집 행랑에 얹혀살며 노동을 제공하거나 역 근처 등을 배회하며 날품을 파는 지게꾼 등 일용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의 하루 일당은 최고 40전에 불과했다. 그런데 당시 설렁탕 값은 한 끼 15전이었으니 일용 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 같은 것이었다.
12. 해방 후~1960년대의 식생활
1945년에 맞은 8 . 15 해방은 '배고픔으로부터 해방'까지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정부수립(1948) 당시만 해도 국민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였다. 쌀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보리밥을 먹어야 했다. 보리쌀의 1인당 소비량은 지난 56년 33.1kg 정도로 97년의 소비량이 1.7g에 불과한 것을 보면 당시 찰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어진 6. 25는 굶주림과 가난을 부채질 하였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으로 끊여 만든 '꿀꿀이죽'은 이 시절의 빈궁함을 증언한다. 건국 직후 미국의 원조밀가루(PL80)가 들어오면서 식량사정은 다소 호전되었으며, 정부는 60년대 중반까지 '분식장려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60년대 중반까지 '보릿고개'는 여전했다. 해방 후에는 제당업과 제분업을 필두로 식품가공 산업이 시작되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식품 공장은 53년 11월 부산 전포동에 설립된 제일제당 설탕공장이었으며 대한제분이 54년 밀가루 생산을 시작했다. 대상(구 미원)이 56년 시판한 '미원'도 음식문화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60년대 초 등장한 라면은 우리 식문화에 본격적인 '가공식품' 시대를 열었다. 음식 맛을 내는 데는 참기름, 부침개를 만들 때는 돼지기름을 쓰던 시절이던 67년 신동방(구 동방유량)이 내놓은 식용유는 우리 식생활에서 유지류의 이용이 보편화시켰다. 1936년에 서울 우유 협동조합이 결성되면서 원유의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으며, 버터와 분유는 64-65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13. 1970년대 이후의 식생활
70년대 초 '녹색혁명'이라 불리는 통일벼 대량재배의 성공으로 쌀 수확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식량생산량이 열량필요량을 충족할 수 있게 되었으며, '보릿고개'라는 말은 사전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 후 국민들이 어느 정도 굶주림을 면하게 되자 '맛이 없다'는 이유로 84년에 이르러 통일벼 재배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87, 88년 연속 대풍이 들면서부터 맛도 좋은 일반미로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찰이 남아돌면서 쌀 막걸리, 쌀 과자 제조가 장려되기도 했다. 71, 72년에 오뚜기에서 서양식 기본 소스인 케첩과 마요네즈가 잇따라 출시되면서 간장, 된장, 고추장, 젓갈 등 전통 조미료로 맛을 내는 한식 중심의 식생활에 서양음식이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단초가 되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소득증대, 여성취업 증가, 핵가족화, 레저문화의 확산 등 외식산업이 발전되기 위한 제반 사회여건이 성숙됨에 따라 외식업체의 수와 가계지출 중 외식비가 크게 증가하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음식을 통해 새로운 맛과 분위기, 이색적인 경험을 즐기려는 사회적 욕구가 확산되고 있다.
* 참고문헌
외식산업관리론 - 김기영, 염진철 저 / 현학사 / 2013
외식산업의 이해 - 나정기 저 / 백산출판사 / 2013
외신산업경영학 - 박기용 저 / 대왕사 / 2009
외식산업개론 - 김윤태 저 / 대왕사 / 2011
식생활 문화 - 정혜경, 오세영 저 / 교문사 / 2013
현대인의 식생활과 건강 - 홍희옥, 맹원재 저 / 건국대학교출판사 / 2013
식생활관리 - 권순자 권미리 외 3명 저 / 파워북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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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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