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01 정주영과 마쓰시타의 등장 : 16세기 말 ? 20세기 초의 조선과 일본
02 그들은 창업의 첫 문을 어떻게 열었을까 : 자전거 점포와 쌀가게
03 청년 시절 그들의 캐치프레이즈는 무엇이었나 : 일본 뛰어넘기, 미국 뛰어넘기
04 그들의 삶의 이치와 경영 목표는 무엇인가 : 향상심과 긍정심, 신념과 실천의 무한 확대
05 그들은 어째서 실패한 적이 없는가 : 시련과 실패에 대한 인식
06 정주영 마인드와 마쓰시타의 마인드 : “이봐, 해봤어?”, “고객에겐 90도로 인사해.”
07 물건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기업 : 그들의 조직 관리와 리더십 훈련
08 세상을 구하는 리더 : 정주영이 존경하던 이순신 리더십
09 동아시아형 리더십의 새로운 울림 : 가장 귀한 것은 사람, 자본과 기술은 그다음
02 그들은 창업의 첫 문을 어떻게 열었을까 : 자전거 점포와 쌀가게
03 청년 시절 그들의 캐치프레이즈는 무엇이었나 : 일본 뛰어넘기, 미국 뛰어넘기
04 그들의 삶의 이치와 경영 목표는 무엇인가 : 향상심과 긍정심, 신념과 실천의 무한 확대
05 그들은 어째서 실패한 적이 없는가 : 시련과 실패에 대한 인식
06 정주영 마인드와 마쓰시타의 마인드 : “이봐, 해봤어?”, “고객에겐 90도로 인사해.”
07 물건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기업 : 그들의 조직 관리와 리더십 훈련
08 세상을 구하는 리더 : 정주영이 존경하던 이순신 리더십
09 동아시아형 리더십의 새로운 울림 : 가장 귀한 것은 사람, 자본과 기술은 그다음
본문내용
행동정신: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경영이념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업인으로서 본분에 충실하며, 사회생활의 개선과 향상을 도모하며, 세계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918년 23세 때 창업한 이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자신이 제정한 앞의 가치관에 따라 사업을 진행시켜왔다. 그는 해외사업 전개에 있어서도 각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 그 나라에 기쁨을 주는 것을 가장 큰 의의로 삼았다. 그가 원한 것은 시대의 변화에 상관없이 파나소닉(마쓰시타 전기의 현재 사명)의 사원은 모두 자기의 자리에서 경영이념을 마음속 깊이 체득하고 이것을 되새겨서 스스로 실천해 나가는 모습이었다. 이런 실천의 모습을 담기 위해 파나소닉은 다음과 같이 ‘행동기준’을 정하여 사원의 ‘이정표’로 삼도록 했다. ① 산업보국(産業報國) ② 공명정대(公明正大) ③ 화친일치(和親一致) ④ 역투향상(力鬪向上) ⑤ 예절겸양(禮節謙讓) ⑥ 순응동화(順應童話) ⑦ 감사보은(感謝報恩)
정주영
가장 귀한 것은 사람, 자본과 기술은 그다음: 정주영은 언제나 사람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사람이 곧 가정ㆍ조직ㆍ사회ㆍ국가의 주체이며, 사람이 모여서 가정ㆍ조직ㆍ사회ㆍ국가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회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 사람이며, 자본이나 기술은 그다음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모든 것의 주체는 사람이다. 가정과 조직, 사회와 국가의 주체도 사람이다. 다 같이 건강하고 유능해야 가정과 조직, 사회와 국가가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
우리의 개인을 중심으로 보자면 ‘나→조직→사회→국가’로 인식이 확대되어 가는 형태다. 정주영은 ‘나’보다 ‘국가’를 특히 중시했다. 정주영은 식민지시대에 태어났다. 식민치하에서 정주영의 ‘나’라는 존재는 존재 그 자체를 부인 당했다. 그가 사춘기를 지나고 청년기에 사업을 일으킨 것과 대한민국의 해방(1945년) 및 정부수립(1948년)은 병행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새롭게 수립되는 것을 피부로 감당한 정주영에게 국가라는 인식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국가가 있기에 비로소 ‘나’의 존재감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민족분단과 6ㆍ25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으면서 정주영은 그가 태어난 고향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이 그로 하여금 한국경제 성장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하고, 마지막에는 ‘통일한국’의 이상을 가시화시키려는 살신성인의 도전과 헌신을 다하게 했다.
정주영은 학습력이 매우 강했다. 그는 신식정보를 통해서 세상은 이미 유학에서 얘기하고 있는 ‘전통’ 속의 세상이 아니라,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현대’라는 세상인 것을 알게 됐다. 그의 연이은 가출 시도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벽촌에서 태어났지만 조부의 서당에서 읽은 동양고전을 통해 선비의 정신세계를 나름대로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그의 목표는 매번 새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교사가 되고 싶었고, 다음에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처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무엇보다 시대적 환경이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 정주영은 창업에 눈을 뜨게 되고 결국 그는 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창업한 기업의 이름을 ‘현대’라고 지었다. 정주영이 창업한 기업의 이름을 ‘현대’라고 명명한 것은 그의 사고방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전통의 기반 위에서도 낡은 것에서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는 전통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대’를 구현하고자 했고, ‘현대’를 지향해서 보다 발전된 미래를 창조하고자 했다.
정주영
가장 귀한 것은 사람, 자본과 기술은 그다음: 정주영은 언제나 사람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사람이 곧 가정ㆍ조직ㆍ사회ㆍ국가의 주체이며, 사람이 모여서 가정ㆍ조직ㆍ사회ㆍ국가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회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 사람이며, 자본이나 기술은 그다음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모든 것의 주체는 사람이다. 가정과 조직, 사회와 국가의 주체도 사람이다. 다 같이 건강하고 유능해야 가정과 조직, 사회와 국가가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
우리의 개인을 중심으로 보자면 ‘나→조직→사회→국가’로 인식이 확대되어 가는 형태다. 정주영은 ‘나’보다 ‘국가’를 특히 중시했다. 정주영은 식민지시대에 태어났다. 식민치하에서 정주영의 ‘나’라는 존재는 존재 그 자체를 부인 당했다. 그가 사춘기를 지나고 청년기에 사업을 일으킨 것과 대한민국의 해방(1945년) 및 정부수립(1948년)은 병행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새롭게 수립되는 것을 피부로 감당한 정주영에게 국가라는 인식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국가가 있기에 비로소 ‘나’의 존재감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민족분단과 6ㆍ25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으면서 정주영은 그가 태어난 고향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이 그로 하여금 한국경제 성장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하고, 마지막에는 ‘통일한국’의 이상을 가시화시키려는 살신성인의 도전과 헌신을 다하게 했다.
정주영은 학습력이 매우 강했다. 그는 신식정보를 통해서 세상은 이미 유학에서 얘기하고 있는 ‘전통’ 속의 세상이 아니라,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현대’라는 세상인 것을 알게 됐다. 그의 연이은 가출 시도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벽촌에서 태어났지만 조부의 서당에서 읽은 동양고전을 통해 선비의 정신세계를 나름대로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그의 목표는 매번 새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교사가 되고 싶었고, 다음에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처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무엇보다 시대적 환경이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 정주영은 창업에 눈을 뜨게 되고 결국 그는 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창업한 기업의 이름을 ‘현대’라고 지었다. 정주영이 창업한 기업의 이름을 ‘현대’라고 명명한 것은 그의 사고방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전통의 기반 위에서도 낡은 것에서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는 전통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대’를 구현하고자 했고, ‘현대’를 지향해서 보다 발전된 미래를 창조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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