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보다는 ‘한일병합’이나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올바른 표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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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일합방보다는 ‘한일병합’이나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올바른 표현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체면치레를 위한 조항으로 보아진다.
Ⅷ. 합방후의 식민 정책
이 후에, 일본은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뒤부터 1945년 해방이 이루어지기까지 여러방면에서 우리나라에 식민통치위한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 36년간의 식민통치는 그 성격과 시기에 따라 대략적으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합방에서부터 3.1운동까지로 흔히 ‘무단통치(武斷統治)’시기라 부르는데 합방에 반대하는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강압적으로 탄압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방면에 걸쳐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해 가던 시기였다.
1909년부터 자행된 의병에 대한 ‘남한대토벌작전’을 빌미로 의병뿐 아니라 죄 없는 백성들까지 마구잡이로 죽였으며, 1918년엔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식민지 수탈체제에 적합한 경제구조로 개편하였다.
제2기는 3.1운동 이후부터 만주사변(1931)이 일어나기 전까지인데, 소위 ‘문화정치(文化政治)’의 시기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문화정치를 명분으로 한 민족분열을 획책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또 일부 단체 설립과 신문창간도 허용하였지만, 이들 단체로 하여금 친일여론을 조성하고 신문에 대한 검열을 엄격히 하여 삭제· 압수· 정간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제3기는 만주사변 이후부터 해방 전까지로 만주사변·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키면서 조선을 침략전쟁의 전초기지로 육성하고 군수화 하려는 정책을 폈다.
마치며...
무구한 역사를 자랑해 온 우리 민족은 수많은 전쟁과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존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화가 들어서며 사대주의를 표방했던 수구세력에 의한 쇄국정책으로 문물의 도입이 늦어졌고, 나아가 주변 강대국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그들의 전리품이 되고야 말았다. 일본이 단계적으로 대한제국의 이권과 권리, 주권을 침탈하는 과정은 결코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점도 이번에 더욱 잘 알 수 있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런 상대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대응했던 차원이 그들에 비하여 시간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많이 부족하지 않았었는지 100년을 거슬러 반추하여 보는 시간을 가져도 보았다.
즉,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일 간의 내부의 문제와 외부의 문제가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는 시기에 있어서 바로 옆 국가의 내부가 문제가 우리에게 직접적 영향도 미쳤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최근의 과거 조약문들의 합법, 위법의 논의를 떠나 보다 현실적으로 통찰해보았을 때 우리 내부의 문제가 잘 해결되고 하나의 응집력을 갖춰야 만이 외부의 문제도 잘 풀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다시 스스로 강조하면서, 이번 발표를 마치려 한다.!!!
< 參 考 文 獻 >
이종범 취원규 공저, 『한국 근현대사 입문』, 혜안 1995.
강만길, 『고쳐 쓴 한국 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실, 『한국사의 재조명』,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2.
「대한제국」, 『한국사』42, 국사편찬위원회 1999.
전수병 김갑동 공저, 『주제별로 본 한국역사』, 서경문화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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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4.02
  • 저작시기2018.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5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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