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공산당 선언이란?
1872년 독일어판 서문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2.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3.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
4. 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태도
1872년 독일어판 서문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2.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3.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
4. 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태도
본문내용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모든 사회 성원의 처지를, 심지어는 가장 좋은 조건에 있는 성원들의 처지까지도 개선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늘 아무 구별도 없이 사회 전체에, 아니 주로 지배 계급에 호소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체계를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는 가능한 최상의 사회에 대한 가능한 최상의 계획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정치 활동, 특히 모든 혁명 활동을 배격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하며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작은 실험을 통해, 즉 실례를 보임으로써 새로운 사회 복음의 길을 개척하려고 한다.
미래 사회에 대한 이러한 환상적인 묘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당시 매우 미숙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환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대에 생겨났으며, 사회의 전반적 변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예감으로 가득 찬 최초의 충동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문헌에는 비판적 요소도 들어 있다. 그 저서들은 현존 사회의 모든 기초를 공격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노동자들을 계몽하는 데 가장 값진 자료를 제공했다. 미래 사회에 관한 그들의 적극적인 명제들, 예컨대 도시와 농촌 사이의 대립 폐지, 가족과 사적 영리와 임금 노동의 폐지, 사회적 조화 선언, 단순한 생산 관리 기구의 국가의 전화, 이 모든 명제들은 이제 방금 발전하기 시작했으므로 처음에는 막연하고 명료하지 않게만 알려져 있던 계급 대립이 중지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들도 아직도 순전히 공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비판·공상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의의는 역사가 발전하면 할수록 줄어든다. 계급 투쟁이 발전하여 더욱 명확한 형태를 띠게 됨에 따라 계급 투쟁을 뛰어넘으려는 이 환상적 태도, 즉 계급 투쟁을 극복하려는 환상적 태도는 모든 실천적 의의와 이론적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이 체계의 창시자들은 많은 점에서 혁명적이었으나 그 제자들은 늘 반동적 종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적으로 거듭 발전하는데도 자기 스승들의 낡은 견해를 고집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급 투쟁을 무마하고 대립을 화해시키려 애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 유토피아를 실험에 의해 실현하려고 한다. 즉 개별적인 팔랑스테르를 세우고 국내 이민지를 창설하며 소(小)이카리아---새로운 예루살렘의 축소판---를 건설할 것을 꿈꾸는 것이다. 또 이 모든 사상 누각을 쌓으려고 부르주아들의 자비심과 돈주머니에서 나오는 박애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차츰 위에 서술한 반동적 또는 보수적 사회주의자들의 부류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들과 이 차이는 단지 그들이 더 체계적인 현학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신들의 사회 과학의 기적적인 힘에 대한 환상적 신념을 갖고 있다는 점뿐이다.
그들이 노동자들의 모든 정치 운동을 극력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정치 운동은 오지 자기들의 새 복음에 대한 맹목적 불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영국의 오언주의자들은 차티스트들을 반대하고,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을 반대한다.
4. 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태도
이미 형성된 노동자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 즉 영국의 차티스트들과 미국의 농업 개혁론자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는 제2절에서 본 바대로 명백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당면 목적과 이익을 위해 투쟁하지만, 이와 동시에 현재의 운동에서 그 운동의 미래를 대변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보수와 급진 부르주아지에 맞선 투쟁에서 사회 민주당(Sozialistisch Demokratische Partei)과 손을 잡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적 전통에서 오는 공리 공론과 호나상을 비판할 권리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스위스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급진파를 지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이 당이 모순되는 요소들로, 즉 더러는 프랑스식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들로, 더러는 급진적 부르주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는 않는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토지 혁명을 민족 해방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정당, 즉 1846년에 크라코프 폭동을 일으킨 바로 그 당을 지지한다.
독일에서 공산당은 부르주아지가 혁명적으로 행동하는 한 그들과 손을 잡고 절대 군주제, 봉건적 토지 소유와 반동적 소시민층과 싸운다.
그러나 공산당은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적 대립을 될 수 있는 대로 명확히 의식할 수 있도록 하려고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독일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반드시 도입하게 될 사회·정치적 조건들을 바로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 곧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독일의 반동 계급들이 타도된 뒤에 부르주아 자체에 대항하는 투쟁이 곧바로 시작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독일은 부르주아 혁명의 전야에 있기 때문에, 더구나 17세기의 영국이나 18세기의 프랑스보다 훨씬 더 발전한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지고 유럽 문명 전체가 한층 발전한 조건에서 이 변혁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독일에 주의를 돌린다.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곧바로 이어질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직접적인 서막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현존하는 사회 정치 제도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
이러한 모든 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소유 문제가 더 발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느냐 덜 발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느냐를 가리지 않고 이 문제를 운동의 근본 문제로 앞에 내세운다.
끝으로,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나라 민주주의 정당의 단결과 협력을 위해 어디서나 애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받을 일로 여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정치 활동, 특히 모든 혁명 활동을 배격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하며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작은 실험을 통해, 즉 실례를 보임으로써 새로운 사회 복음의 길을 개척하려고 한다.
미래 사회에 대한 이러한 환상적인 묘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당시 매우 미숙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환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대에 생겨났으며, 사회의 전반적 변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예감으로 가득 찬 최초의 충동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문헌에는 비판적 요소도 들어 있다. 그 저서들은 현존 사회의 모든 기초를 공격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노동자들을 계몽하는 데 가장 값진 자료를 제공했다. 미래 사회에 관한 그들의 적극적인 명제들, 예컨대 도시와 농촌 사이의 대립 폐지, 가족과 사적 영리와 임금 노동의 폐지, 사회적 조화 선언, 단순한 생산 관리 기구의 국가의 전화, 이 모든 명제들은 이제 방금 발전하기 시작했으므로 처음에는 막연하고 명료하지 않게만 알려져 있던 계급 대립이 중지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들도 아직도 순전히 공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비판·공상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의의는 역사가 발전하면 할수록 줄어든다. 계급 투쟁이 발전하여 더욱 명확한 형태를 띠게 됨에 따라 계급 투쟁을 뛰어넘으려는 이 환상적 태도, 즉 계급 투쟁을 극복하려는 환상적 태도는 모든 실천적 의의와 이론적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이 체계의 창시자들은 많은 점에서 혁명적이었으나 그 제자들은 늘 반동적 종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적으로 거듭 발전하는데도 자기 스승들의 낡은 견해를 고집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급 투쟁을 무마하고 대립을 화해시키려 애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 유토피아를 실험에 의해 실현하려고 한다. 즉 개별적인 팔랑스테르를 세우고 국내 이민지를 창설하며 소(小)이카리아---새로운 예루살렘의 축소판---를 건설할 것을 꿈꾸는 것이다. 또 이 모든 사상 누각을 쌓으려고 부르주아들의 자비심과 돈주머니에서 나오는 박애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차츰 위에 서술한 반동적 또는 보수적 사회주의자들의 부류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들과 이 차이는 단지 그들이 더 체계적인 현학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신들의 사회 과학의 기적적인 힘에 대한 환상적 신념을 갖고 있다는 점뿐이다.
그들이 노동자들의 모든 정치 운동을 극력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정치 운동은 오지 자기들의 새 복음에 대한 맹목적 불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영국의 오언주의자들은 차티스트들을 반대하고,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을 반대한다.
4. 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태도
이미 형성된 노동자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 즉 영국의 차티스트들과 미국의 농업 개혁론자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는 제2절에서 본 바대로 명백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당면 목적과 이익을 위해 투쟁하지만, 이와 동시에 현재의 운동에서 그 운동의 미래를 대변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보수와 급진 부르주아지에 맞선 투쟁에서 사회 민주당(Sozialistisch Demokratische Partei)과 손을 잡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적 전통에서 오는 공리 공론과 호나상을 비판할 권리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스위스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급진파를 지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이 당이 모순되는 요소들로, 즉 더러는 프랑스식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들로, 더러는 급진적 부르주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는 않는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토지 혁명을 민족 해방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정당, 즉 1846년에 크라코프 폭동을 일으킨 바로 그 당을 지지한다.
독일에서 공산당은 부르주아지가 혁명적으로 행동하는 한 그들과 손을 잡고 절대 군주제, 봉건적 토지 소유와 반동적 소시민층과 싸운다.
그러나 공산당은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적 대립을 될 수 있는 대로 명확히 의식할 수 있도록 하려고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독일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반드시 도입하게 될 사회·정치적 조건들을 바로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 곧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독일의 반동 계급들이 타도된 뒤에 부르주아 자체에 대항하는 투쟁이 곧바로 시작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독일은 부르주아 혁명의 전야에 있기 때문에, 더구나 17세기의 영국이나 18세기의 프랑스보다 훨씬 더 발전한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지고 유럽 문명 전체가 한층 발전한 조건에서 이 변혁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독일에 주의를 돌린다.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곧바로 이어질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직접적인 서막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현존하는 사회 정치 제도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
이러한 모든 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소유 문제가 더 발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느냐 덜 발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느냐를 가리지 않고 이 문제를 운동의 근본 문제로 앞에 내세운다.
끝으로,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나라 민주주의 정당의 단결과 협력을 위해 어디서나 애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받을 일로 여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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