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방 교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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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서방 교회의 분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분열의 원인
1. 사회 정치적 배경
2. 수위권 문제
3. 신학적 논쟁
1) Filioque 논쟁
2) 성화상 논쟁
Ⅱ. 1054년 교회의 분열
1. 교황 레오 9세
2. 총대주교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3. 상호파문

본문내용

불가피하였다.
3. 상호파문
교황 레오 9세는 두 교회의 관계 개선을 위해 훔베르트 추기경을 대표로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다. 교황의 사절단은 고자세의 입장에서 총대주교를 대하였고, 콘스탄티누스 증여와 사도전승에 의한 교황의 절대적 권한에 의거하여 총대주교에게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하였으며, 또한 서방 교회의 관습이 유효하고 교회의 전승에 맞는 유일한 것임을 제시하였다. 이에 총대주교는 사절단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훔베르트 추기경은 총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파문서를 1054년 7월 16일 성 소피아 성당의 제대 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이 파문으로 인하여 소동이 커지자 질서회복을 위하여 콘스탄티누스 9세 황제는 문서를 소각하였다. 그러나 체룰라리우스는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훔베르트와 사절단을 역파문하고, 필리오케를 거부하였으며 사제들의 결혼과 수염을 기르는 것 등 동방교회의 관습을 옹호하였다. 이로써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완전히 분리되어 오늘날의 서방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갈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별은 두 교회 사이의 공식적인 파문은 아니었다. 훔베르트 추기경의 파문은 레오 9세 교황의 사망 후인 동시에 아직 새 교황 하드리아노 4세의 선출 사이에 있었던 일로서 파문의 효력이 없었고, 또한 동방교회의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의 파문대상도 교황이 아니라 훔베르트 사절단에 대한 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결별 이후 중세기 후반에 일부 비잔틴 교회는 되돌아 왔지만 오늘날 까지 완전한 일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일치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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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1.01.19
  • 저작시기202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143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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