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1, 요약
2, 감상
참고문헌
1, 요약
맹자는 ‘전국시대에 태어나 그 시기에 제후들이 쟁탈하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원인이 인간이 사욕(私慾)을 방임하여 단지 사리(私利)만을 바라고 인의(仁義)를 잊은 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맹자는 양혜왕에게 “왕께서는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라며 인의(仁義)를 역설(力說)하였다. 공자도 “군자는 의(
1, 요약
2, 감상
참고문헌
1, 요약
맹자는 ‘전국시대에 태어나 그 시기에 제후들이 쟁탈하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원인이 인간이 사욕(私慾)을 방임하여 단지 사리(私利)만을 바라고 인의(仁義)를 잊은 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맹자는 양혜왕에게 “왕께서는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라며 인의(仁義)를 역설(力說)하였다. 공자도 “군자는 의(
본문내용
고 송대 이후 논어, 대학, 중용과 함께 사서로 분류되며 오경(시, 서, 역, 예, 춘추)과 함께 유가의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는 송명시기 새로운 유학인 주자학과 양명학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고 조선의 성립과 정치와 사상 전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철학을 발생론적 입장에서 보면 유가와 도가는 모두 옛 성인(聖人)을 최초로 가장 완비한 철인(哲人)이라고 본다. 즉 공자를 비롯하여 맹자와 순자역시 고성(高聖)을 깊이 음미하여 일가를 이루었다는 뜻이리라. 이들이 가장 존경한 인물은 요와 순인데 공자는 이들에 대해“위대하도다! 요의 임금노릇 하심이여. 높고 크도다! 오직 하늘만이 크거늘 오직 요임금만이 그것을 본받으셨으니 넓고 아득하여 백성들이 뭐라고 이름할 수 없다고 낯 뜨거운 찬양을 하기도 하였다. 맹자도 성의 선함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요와 순을 칭송하였다. 맹자는 요순의 도(道)를 대표로 삼아 인정(仁政)을 논하고 의(義)를 강조하였다. 맹자는 공자를 본받기를 바라고 생민(生民) 이래로 공자만큼 훌륭한 인물이 없다고 극찬하였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켰고, 그 결과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으로 칭송 받고 있다. 맹자의 사상 체계는 공자의 인(仁)의(義)예(禮) 사상을 기반으로 하였고, 학문 태도는 공자의 “선현의 제도를 전하되 창작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본받았으며, 요순(堯舜)의 도(道)를 소중히 여겨 선왕(先王) 사상을 견지하였다.
전국시대는 정치사회적으로는 열국의 쟁투가 심각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자유로움과 치열함이 혼재된 시대였다. 그리스 철학이 도시 국가의 존망 속에서 찬란하게 피어오른 것처럼 제자백가 또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동양사상의 찬란한 꽃을 피웠으며 그 정점에 공자와 맹자를 필두로 한 유교사상이 있었다. 노자의 도가는 대체적으로 체제 부정과 무정부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민중 속에 자리 잡은 반면 유가의 정치사상은 지식인들의 교육과 치세의 도로 지위를 굳혔다. 특히 맹자는 공자 사상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왕도의 정치론과 혁명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선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펼치면서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맹자는 이익, 힘, 욕망, 대신에 인의 덕, 마음을 이야기한다. 비록 당대 통치자들을 변화시켜 좋은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꿈을 실현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정치론과 인성론은 후대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참고문헌
동서양고전의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중국철학을 발생론적 입장에서 보면 유가와 도가는 모두 옛 성인(聖人)을 최초로 가장 완비한 철인(哲人)이라고 본다. 즉 공자를 비롯하여 맹자와 순자역시 고성(高聖)을 깊이 음미하여 일가를 이루었다는 뜻이리라. 이들이 가장 존경한 인물은 요와 순인데 공자는 이들에 대해“위대하도다! 요의 임금노릇 하심이여. 높고 크도다! 오직 하늘만이 크거늘 오직 요임금만이 그것을 본받으셨으니 넓고 아득하여 백성들이 뭐라고 이름할 수 없다고 낯 뜨거운 찬양을 하기도 하였다. 맹자도 성의 선함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요와 순을 칭송하였다. 맹자는 요순의 도(道)를 대표로 삼아 인정(仁政)을 논하고 의(義)를 강조하였다. 맹자는 공자를 본받기를 바라고 생민(生民) 이래로 공자만큼 훌륭한 인물이 없다고 극찬하였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켰고, 그 결과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으로 칭송 받고 있다. 맹자의 사상 체계는 공자의 인(仁)의(義)예(禮) 사상을 기반으로 하였고, 학문 태도는 공자의 “선현의 제도를 전하되 창작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본받았으며, 요순(堯舜)의 도(道)를 소중히 여겨 선왕(先王) 사상을 견지하였다.
전국시대는 정치사회적으로는 열국의 쟁투가 심각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자유로움과 치열함이 혼재된 시대였다. 그리스 철학이 도시 국가의 존망 속에서 찬란하게 피어오른 것처럼 제자백가 또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동양사상의 찬란한 꽃을 피웠으며 그 정점에 공자와 맹자를 필두로 한 유교사상이 있었다. 노자의 도가는 대체적으로 체제 부정과 무정부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민중 속에 자리 잡은 반면 유가의 정치사상은 지식인들의 교육과 치세의 도로 지위를 굳혔다. 특히 맹자는 공자 사상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왕도의 정치론과 혁명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선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펼치면서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맹자는 이익, 힘, 욕망, 대신에 인의 덕, 마음을 이야기한다. 비록 당대 통치자들을 변화시켜 좋은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꿈을 실현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정치론과 인성론은 후대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참고문헌
동서양고전의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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