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유대교와 유일신론의 발전 ㆍ 야웨신 ㆍ 야웨의 패배?
2.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의 출현
ㆍ 헬레니즘과 만나는 유대인 ㆍ 묵시론의 자극
ㆍ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
3. 고전 그리스도교 전통의 전제들
ㆍ 이원론의 도전들 ㆍ 신론의 구축
4.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 교리
ㆍ 그리스도는 신이었나? ㆍ 어떻게 신은 셋인가?
ㆍ 정통적 입장
5. 중세 ㆍ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ㆍ 신비주의와 동방 그리스도교
ㆍ 이성과 계시 ㆍ 토마스의 종합
6. 개신교 종교개혁
ㆍ 노리치의 줄리안과 신의 선하심
ㆍ 마르틴 루터와 은혜로운 신 ㆍ 장 칼뱅과 신의 영광
7. 계몽주의와 근대
ㆍ 이성의 신 ㆍ 현대 신학의 탄생
ㆍ 절대정신으로서의 신 ㆍ 종교에 대한 비판
8. 20세기
ㆍ 칼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ㆍ 폴 틸리히와 궁극적 관심
ㆍ H. 리처드 니버의 철저한 신앙
ㆍ 새로운 도전과 의제들(과정 신학 / 해방 신학 / 흑인 신학 / 페미니스트 신학 /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 카우프만-신으로서의 창조성 / 구스타프슨의 신중심주의)
9. 결론 더 읽을거리
2.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의 출현
ㆍ 헬레니즘과 만나는 유대인 ㆍ 묵시론의 자극
ㆍ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
3. 고전 그리스도교 전통의 전제들
ㆍ 이원론의 도전들 ㆍ 신론의 구축
4.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 교리
ㆍ 그리스도는 신이었나? ㆍ 어떻게 신은 셋인가?
ㆍ 정통적 입장
5. 중세 ㆍ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ㆍ 신비주의와 동방 그리스도교
ㆍ 이성과 계시 ㆍ 토마스의 종합
6. 개신교 종교개혁
ㆍ 노리치의 줄리안과 신의 선하심
ㆍ 마르틴 루터와 은혜로운 신 ㆍ 장 칼뱅과 신의 영광
7. 계몽주의와 근대
ㆍ 이성의 신 ㆍ 현대 신학의 탄생
ㆍ 절대정신으로서의 신 ㆍ 종교에 대한 비판
8. 20세기
ㆍ 칼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ㆍ 폴 틸리히와 궁극적 관심
ㆍ H. 리처드 니버의 철저한 신앙
ㆍ 새로운 도전과 의제들(과정 신학 / 해방 신학 / 흑인 신학 / 페미니스트 신학 /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 카우프만-신으로서의 창조성 / 구스타프슨의 신중심주의)
9. 결론 더 읽을거리
본문내용
스트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창조주, 그리스도, 성령으로 고칠 것을 제언한다. 교회가 가부장적인 구조일까?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최근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가 증가한 것은 바르트, 칼 라아너의 공로이다. 몰트만은 바르트와 라아너가 양태론을 취하였다고 비판하였다(199). 그런데 몰트만에게 양태론과 유일신론은 동일한 수준이다. 양태론도 유일신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몰트만의 삼위일체 개념은 사회적 삼위일체론(social trinitarianism)이다. 이는 성자 예수의 역사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특수한 전통에서 출발하여 삼위일체에 관한 역사적 교리를 개발하는 데까지 나간다. 신의 일치는 세 인격의 상호 관계 및 상호 침투(Perichoresis) 안에서 셋의 일치라고 하였다. 몰트만은 다메섹 요한의 페리코레시스 또는 치르쿠민세시오(circumincession, 상호내재)를 복원하였다. 오리겐도 세 인격의 일치를 사랑 안에서 일치로 보았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의 측면에서만 신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202).
카우프만-신으로서의 창조성 유일신론에 대한 몰트만의 비판은 유일신론 신에 대한 성서적 믿음을 이해하는 적절한 방법으로 제시한 니버의 권고와는 극과 극이다(202). 니버의 학생인 고든 카우프만(Gordon D. Kaufman, 1916 - 2011, Constructive Theology)은 멘토의 전통에서 한걸음 더 나갔다.
카우프만은 칸트처럼 유신론 신앙의 도덕적 함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카우프만은 도덕 작인이 신 개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카우프만은 기독교가 자기 관점을 절대화할 때에 정치,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제시하였다(206). 카우프만도 니버처럼 철저한 유신론적 신앙과 철두철미한 역사적, 문화적 상대주의를 결합하였다(207).
/ 구스타프슨의 신중심주의 니버의 또 다른 학생은 제임스 구스타프슨(James M. Gustafson, 1925년 12월 2일 - 2021년 1월 15일 )이다. 카페츠가 하버드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하버드 계열 신학자로 마지막을 정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황 윤리(Situation Ethics)의 조셉 플레쳐(Joseph Fletrher, 1905-1991)와 동시대 위인이다. 스탠리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는 동생 니버와 구스타프슨에게 배웠는데, 메노나이트의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에게 심취하면서 전환하였다.
구스타프슨도 역사적 문화적 상대주의의 통찰로 신학적 특을 개발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구스타프슨은 계시에 근거한 신학은 물론이고 자연신학도 신에 대해 안다고 주장한 것들이 지나치게 과하다고 생각하였다. 구스타프슨은 신중심적 요소를 복원하며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였다. 카페츠는 경건을 강조하는 구스타프슨에 대해서 칼빈과 슐라이어마허와 연속성을 밝혔는데(211), 정당하지 않다. 칼빈의 신 개념과 구스타프슨의 신 개념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9. 결론
과거를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은 역사에서 현재 순간의 방향에 대한 관심에서 어느 정도 비롯된다. 게다가 모든 역사 해석은 동시대의 환경이 제기한 중요한 도전을 인식함으로써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도교 신 이해 방식에 대한 이 간략한 역사는 신을 믿는 신앙의 의미를 살피는 현재의 성찰을 위한 여러 선택지와 문제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만으로는 이 모든 물음에 답하기에, 그리고 역사의 현 순간의 도전에 응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역사적 조망에서 도출되는 딱 부러지는 깔끔한 결론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조망은 그리스도교 전통이 변화하는 필요와 통찰들에 응답하면서 계속 발전함에 따라, 미래가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토론 논쟁 논란이 계속될 것임을 시사합니다.(중략)
오늘날 핵심 쟁점은 그리스도교 내부의 에큐매니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및 비그리스도교 종교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발견하는 세계가 점점 작아져서 더욱 서로를 의존하게 되는 우리 시대에는 다르 종교들과 그들의 역사가 그리스도교 못지 않게 복잡성을 띤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카페츠의 <그리스도교의 신>을 읽으면서....
에큐메니칼... 2022년 독일에서 개최되는 WCC의 에큐메니칼을 생각하게 된다. 에규메니칼은 기독교에 두 부류가 있게 되었다. 정통 교리를 근거하여 에큐메니칼을 확립할 것인가? 교리를 배제하여 에큐메니칼을 확립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정통 교리에 근거하여 교회 세움을 시도한다. 카페츠는 후자 견해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저술이다. 마지막 결론에서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밖에 있는 제종교화 관계 설정을 시도하려고 한다. 교리를 배제한 에큐메니칼은 제종교 통합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
카페츠는 묶은 에큐메니칼 기독교는 우리의 진영을 포함시켜 진행하기 때문에 매우 포괄적이지만, 그 포괄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포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는 다름과 틀림에서도 인내와 관용을 추구하는데, 과연 종교다원주의 체계에서 예수로 말미암은 배타적 구원 개념을 허용할지 궁금하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대에 포괄적 구원 개념을 가진 종교들과 배타적 구원 개념과 박해 상황에서 복음을 전도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주의 살아계심과 통치를 증거하며 실현하는 것이다. 카페츠는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즘과 비그리스도교 종교와 관계를 통해서 넓은 세계 이룸을 제언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넓은 세계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이룸을 추구한다. 구원은 구주의 이름에 있다.
<2021.09.30에 약 일주일 동안 정리함, 면밀한 탈고가 없기 때문에 리딩 도움을 위한 자료로 합당함>
1. 카페츠의 <그리스도교의 신>을 함께 읽으면서 도움을 받도록 제작하였다.
2. 기독교 전체 역사를 개괄할 수 있는 한 훈련이다.
형람서원 고경태 박사
연락 010-8525-0288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버지의 뜻은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최근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가 증가한 것은 바르트, 칼 라아너의 공로이다. 몰트만은 바르트와 라아너가 양태론을 취하였다고 비판하였다(199). 그런데 몰트만에게 양태론과 유일신론은 동일한 수준이다. 양태론도 유일신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몰트만의 삼위일체 개념은 사회적 삼위일체론(social trinitarianism)이다. 이는 성자 예수의 역사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특수한 전통에서 출발하여 삼위일체에 관한 역사적 교리를 개발하는 데까지 나간다. 신의 일치는 세 인격의 상호 관계 및 상호 침투(Perichoresis) 안에서 셋의 일치라고 하였다. 몰트만은 다메섹 요한의 페리코레시스 또는 치르쿠민세시오(circumincession, 상호내재)를 복원하였다. 오리겐도 세 인격의 일치를 사랑 안에서 일치로 보았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의 측면에서만 신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202).
카우프만-신으로서의 창조성 유일신론에 대한 몰트만의 비판은 유일신론 신에 대한 성서적 믿음을 이해하는 적절한 방법으로 제시한 니버의 권고와는 극과 극이다(202). 니버의 학생인 고든 카우프만(Gordon D. Kaufman, 1916 - 2011, Constructive Theology)은 멘토의 전통에서 한걸음 더 나갔다.
카우프만은 칸트처럼 유신론 신앙의 도덕적 함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카우프만은 도덕 작인이 신 개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카우프만은 기독교가 자기 관점을 절대화할 때에 정치,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제시하였다(206). 카우프만도 니버처럼 철저한 유신론적 신앙과 철두철미한 역사적, 문화적 상대주의를 결합하였다(207).
/ 구스타프슨의 신중심주의 니버의 또 다른 학생은 제임스 구스타프슨(James M. Gustafson, 1925년 12월 2일 - 2021년 1월 15일 )이다. 카페츠가 하버드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하버드 계열 신학자로 마지막을 정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황 윤리(Situation Ethics)의 조셉 플레쳐(Joseph Fletrher, 1905-1991)와 동시대 위인이다. 스탠리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는 동생 니버와 구스타프슨에게 배웠는데, 메노나이트의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에게 심취하면서 전환하였다.
구스타프슨도 역사적 문화적 상대주의의 통찰로 신학적 특을 개발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구스타프슨은 계시에 근거한 신학은 물론이고 자연신학도 신에 대해 안다고 주장한 것들이 지나치게 과하다고 생각하였다. 구스타프슨은 신중심적 요소를 복원하며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였다. 카페츠는 경건을 강조하는 구스타프슨에 대해서 칼빈과 슐라이어마허와 연속성을 밝혔는데(211), 정당하지 않다. 칼빈의 신 개념과 구스타프슨의 신 개념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9. 결론
과거를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은 역사에서 현재 순간의 방향에 대한 관심에서 어느 정도 비롯된다. 게다가 모든 역사 해석은 동시대의 환경이 제기한 중요한 도전을 인식함으로써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도교 신 이해 방식에 대한 이 간략한 역사는 신을 믿는 신앙의 의미를 살피는 현재의 성찰을 위한 여러 선택지와 문제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만으로는 이 모든 물음에 답하기에, 그리고 역사의 현 순간의 도전에 응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역사적 조망에서 도출되는 딱 부러지는 깔끔한 결론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조망은 그리스도교 전통이 변화하는 필요와 통찰들에 응답하면서 계속 발전함에 따라, 미래가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토론 논쟁 논란이 계속될 것임을 시사합니다.(중략)
오늘날 핵심 쟁점은 그리스도교 내부의 에큐매니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및 비그리스도교 종교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발견하는 세계가 점점 작아져서 더욱 서로를 의존하게 되는 우리 시대에는 다르 종교들과 그들의 역사가 그리스도교 못지 않게 복잡성을 띤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카페츠의 <그리스도교의 신>을 읽으면서....
에큐메니칼... 2022년 독일에서 개최되는 WCC의 에큐메니칼을 생각하게 된다. 에규메니칼은 기독교에 두 부류가 있게 되었다. 정통 교리를 근거하여 에큐메니칼을 확립할 것인가? 교리를 배제하여 에큐메니칼을 확립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정통 교리에 근거하여 교회 세움을 시도한다. 카페츠는 후자 견해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저술이다. 마지막 결론에서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밖에 있는 제종교화 관계 설정을 시도하려고 한다. 교리를 배제한 에큐메니칼은 제종교 통합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
카페츠는 묶은 에큐메니칼 기독교는 우리의 진영을 포함시켜 진행하기 때문에 매우 포괄적이지만, 그 포괄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포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는 다름과 틀림에서도 인내와 관용을 추구하는데, 과연 종교다원주의 체계에서 예수로 말미암은 배타적 구원 개념을 허용할지 궁금하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대에 포괄적 구원 개념을 가진 종교들과 배타적 구원 개념과 박해 상황에서 복음을 전도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주의 살아계심과 통치를 증거하며 실현하는 것이다. 카페츠는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즘과 비그리스도교 종교와 관계를 통해서 넓은 세계 이룸을 제언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넓은 세계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이룸을 추구한다. 구원은 구주의 이름에 있다.
<2021.09.30에 약 일주일 동안 정리함, 면밀한 탈고가 없기 때문에 리딩 도움을 위한 자료로 합당함>
1. 카페츠의 <그리스도교의 신>을 함께 읽으면서 도움을 받도록 제작하였다.
2. 기독교 전체 역사를 개괄할 수 있는 한 훈련이다.
형람서원 고경태 박사
연락 010-8525-0288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버지의 뜻은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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