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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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득권과 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로마제국의 역사
2. 로마제국의 성장과 쇠퇴

본문내용

이 그 몰락 원인이라고 규정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종교, 정치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사 등 인간생활의 제반 측면에 대한 관심이 더 폭 넓게 확산되었다. 예를 들면 핀리는 제국의 멸망을 문화적 토양에서 찾았고, 퓌스뗄 드 꿀랑쥐는 대지주의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했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호드킨은 노예제의 폐단, 로마 무산자들의 극빈화, 자치 도시의 붕괴, 페르시아와 게르만의 침입 등을 들었다. 또한 헌팅턴은 기후 변화와 농토의 고갈을 원인으로 든다.
로마 멸망에 따른 이상의 여러 견해들을 주제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도미나투스 체제의 폐단이다. 전제적인 제권으로 인해 로마 사회가 탄력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세금징수를 위해 직업과 신분을 고정 시킴으로써, 자유로운 경제의 흐름이 차단되었다. 또한 대규모 관료체제와 군사력의 증강은 막대한 재정의 지출을 초래하였는데, 이는 과중한 수세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과중한 수세와 국가 재정의 방안으로 주조된 악화의 강제 유통은 바로 화폐 경제 혼란을 초래하여 제국의 경제를 돌이킬 수 없는 파탄으로 몰아갔다.
나아가 이러한 현상들은제국에 대한 지방민의 애착을 약화시켰다. 군인 황제 대를 거치면서 군단과 정치의 중심이 상당부분 지방에 분산되어 있었던 것도 원심적 경향을 조장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다음은군대의 질 저하와 게르만족의 유입문제이다. 로마 시민보다 속주 이민족 출신의 군인이 많아짐으로써 군대가 로마시민이 아닌 속주 출신의 이민족의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또노예제의 폐단이 있다. 강제 노동으로 인한 생산의 비능률성, 노예반란 혹은 태업 등이 장기적으로 제국의 생산력을 저하시켰다는 점이다. 동시에 노예노동은 기술 개발을 촉진 시키지 못하였고, 사회 전체에 노동을 천시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이어서 제국의 정복전이 한계에 다달아 노예의 공급원도 끊기자, 라티푼디움체제는 위기를 맞이하고 마침내 콜라나투스제로 전환해간다.
제국의 위기를 초래한 것으로 제국 후반기전염병 등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도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다. 이에 더하여로마인의 정신적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퇴폐적이고 향락적 생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임신, 출산, 육아 등을 포기하는 현상과도 연관된다. 제정기 로마 인구는 백만 정도로 감소하였는데 이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그 같은 퇴폐적 풍조의 약화로 연결된다. 로마의 멸망과 관련하여 한마디로 덧붙이자면, 서로마가 망하고 난 뒤에도 서구에서는 항상 영원한 로마제국의 재건을 꿈꾸면서 그 멸망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공화정 초기에 귀족과 평민 간 치열했던 계급투쟁이 종결을 지으면서, 로마는 해외로 팽창하기 시작했고, 그 극적인 예가 카르타고와 그리스의 정복이었다. 한낱 조그만 한 도시 공동체에서 출발하여 이제 지중해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적인 해외팽창은 필연적으로 원로원 과두체제로 다스려지던 도시 공동체 로마에 변화를 강요하게 되었다. 과두체제하에서 지중해 세계를 일원적 체제로 다스릴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농업 노동력 구성의 변화와 도시빈민의 급증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떼어서 설명할 수 없다. 변화의 양상은 카르타고와 오랜 격전(포에니전쟁)을 치르면서 나타났다.장기간의 전쟁은 한창 일할 나이의 청장년층을 장기 복무케 하였으며 그들이 장기 복무 하는 동안 토지는 황폐화된 채 귀족의 소유로 넘어갔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지배층들은 적의 대토지를 몰수하여 자신의 토지로 삼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적인 해외팽창은 필연적으로 원로원 과두체제로 다스려지던 도시 공동체 로마에 변화를 강요하게 되었다. 과두체제하에서 지중해 세계를 일원적 체제로 다스릴 수 없었던 것이다. 토지를 잃은 병사들은 자영농의 자격을 잃은 채 무산자화(無産者化) 되었다. 귀족의 꾸준한 토지독점은자영농의 꾸준한 감소와 프로레타리아 층의 가차 없는 증대와 맞물려서 나타났다. 이미 기원전 200~167년 동안에로마 성년남자들 중 10%는 항상 군복무중이었으며 또한 전쟁에서의 사상자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군사적 모험이 가능했던 이유는 후방의 민간경제를 노예들이 대신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의 급증과 귀족사유지의 확대는 이제 기존의 소규모 토지 보유자 중심의 로마 농업경제에 새로운대농장제도(latifundium)를 도입하게 하였다. 이 대농장제도의 출현이 포에니 전쟁 전 기간을 통해 로마경제를 뒷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로마의 주요 생산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자영농이 프로레타리아가 된 것은 아니었다. 자영농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비록 산간벽지나 오지로 밀려났지만, 계속 존재했으며 단지 눈에 띄게 감소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자영농의 꾸준한 감소’라고는 하지만, 이 자영농의 감소는 로마공화정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토양을 제공했다. 그들은 귀족의 소작인이 되기도 하였으나, 많은 수가 당시 호황기를 누리고 있던 도시로 몰려 들었고 곧 도시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바로무산자(無産者)들이 공화정을 멸망시킨 정정변란(政情邊亂)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은 간단했다. 무산자가 된 그들에게 토지를 다시 마련해 주어 정착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초로 개혁을 시도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은 현재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를 인정해주는 대신에 공유지를 나누어 주자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원로원과 귀족, 벌족파들에 의해 반발을 샀으며, 원로원의 사주를 받은 무산자계급에 타살 당함으로써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안은 형의 것보다 더 과격한 개혁안이었다. 가이우스는 형의 실패를 되씹지 않기 위해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하였지만 그도 역시 개혁엔 실패하였다. 이때 그는 중요한 정치적 자층수를 두었다. 전통의 로마 국법을 어기는 정치적 행위를 한 것 때문에 공화정의 전통을 지키려는 로마귀족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무산자층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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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18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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