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김제 답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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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익산 김제 답사자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익산지역
익산개관 · 미륵사터 · 왕궁리 오층석탑 · 동고도리 석불
Ⅱ. 김제지역
김제지역 개관 · 금산사 · 강증산유적지

본문내용

0.8m이며, 상층 기단은 한 변이 약 8.5m에 높이가 0.6m이다. 상하 기단은 모두 대석, 면석, 갑석으로 축조되었고 상하층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후대에 제작된 것들도 끼여 있다. 하층 기단 둘레에는 난간을 돌렸던 것으로 보이는 돌기둥이 남아 있는데, 이 기둥에는 얼굴 모습이 기이한 인물상을 조각해놓았고 사방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세웠다.
이 석단 위 한가운데에, 네 귀퉁이에 사자의 머리가 조각된 한 장의 판석이 놓여 방등계단을 받치고 있다. 판석의 중심부 방등계단을 받치는 곳에는 복판 연화문이 빙 둘러져 있다. 방등계단의 높이는 2.27m이고, 범종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랫부분에는 화문대를 돌렸다. 위에는 아홉 마리 용의 머리가 조각된 돌을 얹고 또 그 위에 둥근 연화석과 보주석을 얹었다. 종의 몸체가 가늘고 긴 편인 데 비해 윗부분이 큼직하다. 아홉 용이 조각된 것은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목욕시켰다는 구룡토수 설화에서 연유한 듯하다. 이러한 방등계단은 14세기 중엽에 서역의 승려 지공이 고려에 법맥을 전한 다음부터 그의 종파에서 건립되기 시작하여 조선 시대 승탑의 형식 가운데 하나를 이룬다.
<오층석탑 후백제의 견훤이 공양탑으로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신라 석탑의 기본형을 보이는 고려 초의 탑이다.>
8) 오층석탑 : 보물 제25호
방등계단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계단(戒壇) 앞에는 석등을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이곳에는 석등 대신 석탑이 있다.
신라 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지만 하층 기단이 좁은 편이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 상층 기단, 갑석, 1층 탑신부는 모두 여러 개의 돌들을 짜맞춘 것이지만, 2층 이상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이루어졌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3단으로 줄고 얕아졌으며 처마가 길어지면서 중심에서부터 양끝을 향하여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 고려탑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급한 편이나 모서리의 반전은 심하지 않다. 5층 지붕돌 위의 상륜부에는 일반 석탑에서처럼 노반이 있는데, 그 네 모서리에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그 위에는 갑석형의 판석이 하나 올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 탑을 육층탑으로 오인하는 수도 있지만, 그것은 또 한 층의 탑신부가 아니고 특이한 형태의 복발일 뿐이다. 복발 위에는 보륜과 보주가 있다. 후백제 왕 견훤이 공양탑으로 건립했다는 설도 있지만, 「석탑중수기」에 따르면 고려 성종 원년(982)에 처음 세웠고 조선 성종 23년(1492)에 도괴된 것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높이 7.2m이며 보물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9) 혜덕왕사 진응탑비 : 보물 제24호
금산사 동쪽 옛 봉천원구터 북쪽 언덕에 있는 부도전에는, 높이 2.78m, 폭 1.5m의 대리석 비가 있다. 고려 숙종 원년(1095)에 금산사 봉천원에서 입적한 혜덕왕사의 탑비로 보물 제24호이다.
탑비의 비신과 귀부는 완전하게 남아 있으나 이수는 파괴되어 그 조각이 전주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쌍룡이 여의주를 다투는 일반적 형식이다. 귀부는 하나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졌고 육각의 거북등 무늬에는 잎이 네 개인 화문을 새겼으며 머리에 비해 몸이 작은 편이다.
당대의 명필 정윤이 해서체로 비문의 글씨를 썼지만 마멸이 심해서 판독하기가 어렵다. 비신 둘레에 우아한 당초문이 새겨져 있고 비신에는 43행 77자의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끝 부분에 천경(天慶 : 연나라의 연호) 원년(고려 예종 6년, 1111)이라는 기록이 있어 혜덕왕사 사후 15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응탑비 주변에는 왜란 이후 금산사를 중창한 대덕들의 부도가 즐비하다.
3. 강증산 유적지
3-1. 강증산의 생애와 그 이후 교단의 전개
1) 강증산의 생애
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은 1871년 11월에 전라도 고부군 손바래기(지금의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새터)에서 태어났는데 호가 증산(甑山)이다. 「증산종단개론」에는 고부가 명당임을, 손바래기는 호남평야에 자연의 지기를 실어온 노령산맥의 영기를 품은 마을이며, 삼신산의 주산인 방장산에서 동으로 뻗어내린 정기가 손바래기 위에 뭉치고 서려서 시루봉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손바래기는 인류를 구원할 우주의 손님을 기다린다는 전설을 가진 신성지역으로 재평가가 시도되고 있으며, 증산이라는 호도 단순히 지어진 것이 아니라 솥과 시루를 뜻하는 것으로 설익어 편협하고 미완성인 이제까지의 인류문명을 익혀서 완성시킨다는 심오한 의미를 지닌 예정된 조화로 이해되고 있다.
증산의 출생에 대한 신비한 신화적 기술을 하고 있으며, 상제와 일체화시키는 과정에서 상제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대순전경(大巡典經)』에 의하면 증산은 옥황상제로서 구천에 머물러 있을 때, 지상의 모든 신명과 불타와 보살들이 하늘에 올라와 인류와 신명계에의 큰 겁액을 하소연하므로 세상을 구원할 결심으로 이 땅에 내려오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구천상제로서 천지공사의 주재자이며 천지공사라고 하는 종교적 의례를 통해 선천을 고쳐 후천선경(後天仙境)의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증산 강일순은 청년기에 서당을 차리고 학생을 가르치는 동안 유교의 서적을 읽는 한편 당시 호남지방에 상당한 세력을 떨쳤던 동학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학혁명 실패 후 모악산 대원사에 들어가 천지대도를 깨달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증산이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얻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 권능을 통해 행해지는 천지공사란 천지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행위인 듯하다. 그러나 증산에 있어 그 행위는 깊은 내면적인 것이다. 증산은 무력, 정치 같은 어떠한 표층적인 행위로 이 세상을 구할 수 없고, 종교적 해원이 문제 해결이라는 방향에서 이 세상의 뿌리부터 뜯어고치려 했다.
증산은 서울에서 서구열강의 침투에 대한 많은 식견과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혼란된 사회에서 민중을 구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증산은 3년의 유력 기간 중 도통했다는 이름 있는 술객 등을 주로 찾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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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3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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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24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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