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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가흥리 마애삼존불과 암각화
2. 흑석사(黑石寺)
3. 신암리 마애불
4. 달실마을[酉谷里]
5. 북지리 마애불
6. 축서사(鷲棲寺)
7. 부석사
2. 흑석사(黑石寺)
3. 신암리 마애불
4. 달실마을[酉谷里]
5. 북지리 마애불
6. 축서사(鷲棲寺)
7. 부석사
본문내용
구조로 대들보 위에 포대공을 앞뒤로 두고 종량(宗樑)을 얹은 다음 사다리 모양의 대공을 얹어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공포의 세부장식이 모두 수직으로 처리되어 있고 대들보가 항아리처럼 불룩하지 않고 길쭉하게 표현된 것은 다른 목조건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요소이다.
<의상대사 진영>
건물 안에는 이 절의 창건자인 의상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래 입구와 좌우 벽면에 그려졌던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등 고려시대 벽화는 최근에 지은 보호각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이 건물은 기둥의 배흘림이 약화된 점, 첨차의 끝부분이 직선화된 점, 대들보를 가늘고 길게 깎은 기법 등으로 보아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시대가 내려가는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7-3-9. 조사당 벽화 : 국보 49호
부석사에 전하는 벽화 6점은 원래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것이다. 일제 통치시대에 벽체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은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사원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상을 그린 것인데 이 절의 창사주인 의상대사를 기린 조사당에 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를 외호하려는 의도로 제작한 듯하다.
7-3-10. 자인당에 모셔진 석조비로자나불과 석불좌상 : 보물 220호
이 2구의 불상은 처음부터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의 폐사지에서 옮겨 온 것이다.
양손이 깨어졌고 얼굴과 대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자인당의 두 비로자나불 좌상들은 세부 조각만 약간 다를 뿐 형태와 조각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양감이 없는 경직된 신체와 형식화한 옷주름을 지닌 불상이나 다양한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와 대좌는 모두 9세기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자인당에 2구의 비로자나불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석조불상 역시 부석사 동쪽의 절터에서 옮겨 온 것이다. 여러 형식들이 9세기 신라 하대 불상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7-3-11. 단하각
최근세에 지은 정면 1칸 측면 1 칸의 남도리 맞배집으로 응진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손에 쥐를 들고 있는 작은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정면에 걸린 현판의 \'단하\'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리를 얻기 위하여 목불을 쪼개 때었다는 단하소불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 선사를 모신 것이라면 선종과 연관이 있는 전각으로 짐작하고 있다.
단하소불에 관한 고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단하천연(丹霞天然)스님이 어느 겨울 날, 혜림사에 묵었는데 너무 추웠다. 그러자 스님은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불을 보고, 밖으로 들고 나와 도끼로 쪼개어 불을 지폈다. 이것을 본 그 절의 원주스님이 깜짝 놀라서 “무슨 이유로 부처님을 태우는 거요?”하고 꾸짖었다. 그러자 단하스님은 천연덕스럽게 “부처님의 몸을 화장하여 많은 사리가 나왔다기에, 나도 이 부처님을 화장하여 사리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오.”하고 답했다. 원주스님은 “나무로 만든 부처님에게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라고 하면서 몹시 화를 냈다. 단하스님은 “사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부처님이 아니라 나무토막일 뿐이니 뭐 그리 잘못된 일도 없지 않소?”」라고 반문하였다고 하는 고사로써 선종 스님들의 기이한 행적 중에 유명한 고사이다.
단하각에 무량수전으로 흐르는 지맥의 통로에 쥐를 잡고 있는 나한을 봉안한 것은 아무래도 풍수하고 관련성이 있음에 심증이 간다. 봉황산의 봉황알을 쥐가 물고 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다는 전래되는 이야기가 훨씬 설득력도 있어 보인다. 통도사에 가면 천왕문을 통과한 좌측에 지신을 모시는 건물이 있다. 또한 호랑이의 변을 막기 위해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는 호압석을 사찰의 두 곳 땅에 묻어놓고 있다. 이와 같이 전통사찰은 예부터 풍수와 관련된 조성물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단하각은 부석사의 봉황기운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라고 추정해본다.
7-3-12. 부석사 고려각판 : 보물 735호
이 각판은 고려시대에 새긴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의 목판이다. 삼본화엄경은 동진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60권의 『화엄경』진본(晉本)과 당나라 무주(武周)때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권의 『화엄경』 주본(周本), 당나라 정원(貞元) 연간에 반야(般若)가 번역한 40권의 『화엄경』정원본(貞元本)을 일컫는 것이다. 부석사에 현존하는 화엄경판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판 정원본(貞元本) 122매, 진본(晋本) 239매, 주본(周本) 273매, 3종 합 634매로, 고려 때 새긴 원판과 조선 때 새긴 보판(補板)으로 혼성되어 있다.
원판은 간기가 표시된 각판이 없어 정확하게 언제 새겼는지 알 수 없으나, 판식과 각판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때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판식이 권자(卷子) 형식으로 방책(方冊)으로 넘어오는 초기의 좁은 판심(板心)에 어미(魚尾)와 흑구(黑口)가 없고, 한줄에 34자가 새겨져 있는 세자본(細字本)이다. 고려 때 유행하였던 화엄경은 북송대장경(北宋大藏經) 계통의 14자본이 아니면 국내전본 계통의 17자본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석사의 각판만이 유독 특이하게 34본이다.
학계에서 거란본(契丹本)으로 추정하고 있는 매반엽(每半葉) 17항 34자의 『자밀지박(字密紙薄)』의 현존본 2책과 대조하여 보면 같은 계통의 판본을 수입하여 번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번각시기를 학계에서는 13, 14세기로 넓게 추정하고 있다.
보판은 진본 권32의 제9장에 「융경이년무진정월일경상도,영주지태백산부석사개판(隆慶二年戊辰正月日慶尙道,榮州地太伯山浮石寺開板)」이라는 간기가 있어, 보각판(補刻板)은 1568년(선조(宣祖) 1)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석사의 고려각판은 보판을 합쳐도 결판이 있는 미완질판이기는 하나, 오직 이 각판만이 현재 전래되고 있지 않는 거란본계의 번각이므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부석사의 화엄경판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초조(初祖)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의상대사 진영>
건물 안에는 이 절의 창건자인 의상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래 입구와 좌우 벽면에 그려졌던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등 고려시대 벽화는 최근에 지은 보호각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이 건물은 기둥의 배흘림이 약화된 점, 첨차의 끝부분이 직선화된 점, 대들보를 가늘고 길게 깎은 기법 등으로 보아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시대가 내려가는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7-3-9. 조사당 벽화 : 국보 49호
부석사에 전하는 벽화 6점은 원래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것이다. 일제 통치시대에 벽체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은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사원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상을 그린 것인데 이 절의 창사주인 의상대사를 기린 조사당에 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를 외호하려는 의도로 제작한 듯하다.
7-3-10. 자인당에 모셔진 석조비로자나불과 석불좌상 : 보물 220호
이 2구의 불상은 처음부터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의 폐사지에서 옮겨 온 것이다.
양손이 깨어졌고 얼굴과 대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자인당의 두 비로자나불 좌상들은 세부 조각만 약간 다를 뿐 형태와 조각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양감이 없는 경직된 신체와 형식화한 옷주름을 지닌 불상이나 다양한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와 대좌는 모두 9세기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자인당에 2구의 비로자나불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석조불상 역시 부석사 동쪽의 절터에서 옮겨 온 것이다. 여러 형식들이 9세기 신라 하대 불상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7-3-11. 단하각
최근세에 지은 정면 1칸 측면 1 칸의 남도리 맞배집으로 응진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손에 쥐를 들고 있는 작은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정면에 걸린 현판의 \'단하\'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리를 얻기 위하여 목불을 쪼개 때었다는 단하소불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 선사를 모신 것이라면 선종과 연관이 있는 전각으로 짐작하고 있다.
단하소불에 관한 고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단하천연(丹霞天然)스님이 어느 겨울 날, 혜림사에 묵었는데 너무 추웠다. 그러자 스님은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불을 보고, 밖으로 들고 나와 도끼로 쪼개어 불을 지폈다. 이것을 본 그 절의 원주스님이 깜짝 놀라서 “무슨 이유로 부처님을 태우는 거요?”하고 꾸짖었다. 그러자 단하스님은 천연덕스럽게 “부처님의 몸을 화장하여 많은 사리가 나왔다기에, 나도 이 부처님을 화장하여 사리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오.”하고 답했다. 원주스님은 “나무로 만든 부처님에게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라고 하면서 몹시 화를 냈다. 단하스님은 “사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부처님이 아니라 나무토막일 뿐이니 뭐 그리 잘못된 일도 없지 않소?”」라고 반문하였다고 하는 고사로써 선종 스님들의 기이한 행적 중에 유명한 고사이다.
단하각에 무량수전으로 흐르는 지맥의 통로에 쥐를 잡고 있는 나한을 봉안한 것은 아무래도 풍수하고 관련성이 있음에 심증이 간다. 봉황산의 봉황알을 쥐가 물고 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다는 전래되는 이야기가 훨씬 설득력도 있어 보인다. 통도사에 가면 천왕문을 통과한 좌측에 지신을 모시는 건물이 있다. 또한 호랑이의 변을 막기 위해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는 호압석을 사찰의 두 곳 땅에 묻어놓고 있다. 이와 같이 전통사찰은 예부터 풍수와 관련된 조성물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단하각은 부석사의 봉황기운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라고 추정해본다.
7-3-12. 부석사 고려각판 : 보물 735호
이 각판은 고려시대에 새긴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의 목판이다. 삼본화엄경은 동진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60권의 『화엄경』진본(晉本)과 당나라 무주(武周)때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권의 『화엄경』 주본(周本), 당나라 정원(貞元) 연간에 반야(般若)가 번역한 40권의 『화엄경』정원본(貞元本)을 일컫는 것이다. 부석사에 현존하는 화엄경판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판 정원본(貞元本) 122매, 진본(晋本) 239매, 주본(周本) 273매, 3종 합 634매로, 고려 때 새긴 원판과 조선 때 새긴 보판(補板)으로 혼성되어 있다.
원판은 간기가 표시된 각판이 없어 정확하게 언제 새겼는지 알 수 없으나, 판식과 각판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때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판식이 권자(卷子) 형식으로 방책(方冊)으로 넘어오는 초기의 좁은 판심(板心)에 어미(魚尾)와 흑구(黑口)가 없고, 한줄에 34자가 새겨져 있는 세자본(細字本)이다. 고려 때 유행하였던 화엄경은 북송대장경(北宋大藏經) 계통의 14자본이 아니면 국내전본 계통의 17자본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석사의 각판만이 유독 특이하게 34본이다.
학계에서 거란본(契丹本)으로 추정하고 있는 매반엽(每半葉) 17항 34자의 『자밀지박(字密紙薄)』의 현존본 2책과 대조하여 보면 같은 계통의 판본을 수입하여 번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번각시기를 학계에서는 13, 14세기로 넓게 추정하고 있다.
보판은 진본 권32의 제9장에 「융경이년무진정월일경상도,영주지태백산부석사개판(隆慶二年戊辰正月日慶尙道,榮州地太伯山浮石寺開板)」이라는 간기가 있어, 보각판(補刻板)은 1568년(선조(宣祖) 1)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석사의 고려각판은 보판을 합쳐도 결판이 있는 미완질판이기는 하나, 오직 이 각판만이 현재 전래되고 있지 않는 거란본계의 번각이므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부석사의 화엄경판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초조(初祖)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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