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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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암각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한국 암각화 개관

1. 서
2. 한국 암각화의 유형과 성격
2-1. 암각화의 유형
2-2. 암각화의 형식발전
3. 한국 암각화의 편년
3-1. 반구대 · 천전리 · 칠포리 암각화에 대한 편년관 비교
3-2. 한국암각화의 제작단계별 편년

Ⅱ. 한국 암각화의 유적별 개황

1.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1. 암각화 형상
1-2. 암각화의 형상별 상징의미
1-3. 암각화를 통해서 본 선사시대의 어로·수렵기술
2. 울산 천전리 암각화
2-1. 암각화 형상
2-2. 암각화의 현상별 상징의미
3. 칠포리 암각화
3-1. 칠포리 암각화의 분포와 형상
3-2. 칠포리 암각화의 형상과 의미에 대한 학설
4. 석장동 암각화
4-1. 석장동 암각화 형상
4-2. 암각화의 성격과 상징의미
4-3. 전체적 성격
5. 상신리 암각화
5-1. 상신리 암각화 형상
5-2. 암각화 상징

본문내용

발자국과 나란히 새겨진 것은 종족번성을 위한 집단의 강성한 힘을 창출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④ 사람발자국
<발자국과 여근>
발자국의 크기와 모습이 작고 예뻐 아기 발자국 같은 인상을 준다. 우직하고 큰 성인의 발자국의 경우 정복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여성 생식기와 나란히 새겨진 것이 많다는 점에서 출산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바위에 새겨진 발자국에 관련된 이야기가 시경이나 사기 등에 실려 있다. 즉 주의 시조인 후직의 어머니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은 후 후직을 낳았다. 송서(宋書)에 태호의 어머니가 거인의 발자국을 밝고 태호를 낳았다고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의 발자국을 바위에 새기는 것이 여자들이 아이 가지기를 원할 때 밟기 위한 것일 수도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⑤ 배
<배>
배는 어로의 기본 장비이기도 하고, 먼 거리 대량 수송을 용이하게 하는 교통수단이 되기도 한다. 장명주는 여기의 배는 수로를 통해 침입하는 외부세력을 상징한다고 했다.
⑥ 짐승·짐승발자국·사람
<사람·짐승>
<짐승발자국>
짐승은 허리가 긴 체형에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과 둥글고 큰 발 모양으로 보아 호랑이로 추정된다. 짐승발자국 역시 호랑이 발자국일 것이다. 당시 사회가 호환(虎患)에 시달렸음을 추측해 볼 수도 있겠다. 사람은 아마도 호랑이를 산으로 쫓는 모습으로 보인다. 추적을 뜻하는 짐승발자국은 호랑이를 몰아내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⑦ 바위구멍
바위구멍에 대해서 황용운은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구멍을 파고 가는 행위가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모방주술적 신앙행위라고 보았다. 이융조는 별자리로 보거나 특히 고인돌에 새겨진 경우 피장자 자손의 수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장명주는 바위구멍은 새김대상이나 소재가 분명한 그림들과는 달리 새김행위 자체가 주술이나 기원·놀이의 실행이기 때문에 외형에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즉 그림에 따라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4-3. 전체적 성격 : 장명수의 견해
석장리 암각화는 입지가 관방적 위치인 지역 관문에 있고, 그림 내용도 방패무늬와 고깔무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그 구도 또한 방사깃고깔무늬를 중심으로 포진한 마치 수비군의 전략적 배치와 같다. 이점은 그들의 당면 과제가 안보에 있었고 그들의 신에게 기원한 것도 종족 보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또 그림의 주체가 방패무늬와 고깔무늬이기는 하나 사람과 짐승 등 10여 종의 다양한 소재로 구성되어져 있는 점은 당시 사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가 그 만큼 다양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즉 집단간 분쟁에 의한 안보적 도전도 받고 있었지만 호환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 또한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자손 번성의 풍요를 누리고자 하는 생산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 사회가 안보적 도전을 받고 있었지만 다른 방패무늬(칠포리형 무늬)계 암각화의 사회보다도 상대적으로 문제의 심각성이 아직 크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예배의 대상(암각화)이 다양한 점은 신앙의 체계화를 이룩하지 못한 원시신앙의 초기성향으로 파악된다.
그림의 형식은 극히 사실적이고 새김새 또한 쪼아새김이 중심인 것으로 보아 암각화의 초기 작품으로 보여 진다. 특히 회화적 표현의 쪼아새김은 앞 시기의 반구대와 천전리의 전통이 이어진 모습이라 여겨진다.
새김새는 갈아새김 단계에 진입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산과 짐승과 사람을 한 장르로 엮은 그림만이 쪼아새김한 것이다. 이것은 제작단계가 아직 앞 시기의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또 이 그림은 상황전개에 대한 언어적 표현일 뿐 직접적 예배의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주술행위(갈아새김 행위)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쪼아새김한 것으로 보인다.
5. 상신리 암각화
5-1. 상신리 암각화 형상
상신리 암각화는 경주시 내남면 상신1리 광석 마을 동남 외곽에 있다. 이 지역은 형산강 상류의 작은 지천을 낀 좁은 분지이다.
바위의 정면은 부정형이기 때문에 그림이 새겨진 면이 4개로 나누어졌다. 이 면들은 약 40°~60°로 기울었다. 그림은 석장동 암각화와는 달리 한 두 개의 바위구멍을 새겼을 뿐 30개 이상의 순수 방패무늬(칠포리형무늬)로만 새겨진 단순한 구성이다.
서향한 뒷면은 수직면인데 가운데 위쪽에 치우쳐 1개 이상(불확실한 흔적 몇 개가 있다.)의 방패무늬가, 윗면 역시 4개의 수평면에 10여 개의 크고 작은 바위구멍과 함께 15개 이상의 방패무늬가 있다.
그 외에 특이한 것은 그림이 새겨진 부분과 구별된 가운데 확의 기능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 두 개와 큰 구덩이 하나가 파여져 있다는 점이다. 새김새를 보면 방패무늬는 선쪼아새김으로 밑 그림의 틀을 잡은 후에 약하게 갈아새김하였고, 확과 바위구멍은 쪼아파고 돌려간 전통적 구멍새김이다.
상신리 암각화 역시 그림 전체의 구도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마치 바위를 산성(山城)으로 상징하고 방패를 견고히 횡대열로 몇 겁 둘러친 듯한 전략적 방위대오 같은 느낌이다.
5-2. 암각화 상징 : 확
<확>
확은 확 그대로의 기능, 또는 제기나 성혈, 놀이구멍 등 여러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즉, 확이나 제기의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윗면 중단 서쪽에 있는 큰 두덩이 인데 제물(祭物 : 곡물)을 이 확에서 찢거나 빻았을 가능성 또한 있다. 안동 수곡리 암각화에도 유사한 성격의 확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뒤편에 치우친 구덩이의 위치를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다른 기능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인공 흔적이 미약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윗면 중단에 파여진 확은 유난히 깊고 계속해서 덧 파고 들어간 흔적이 뚜fut해서 바위구멍에서와 같이 후대의 성혈 또는 놀이구멍일 가능성이 높다.
상신리 암각화 역시 소재나 구도, 새김새 등의 특성으로 보아 석장리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만들어진 성격의 그림일 것이다. 다만 그림의 구성이 방패무늬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소재인 점에서 상황이 훨씬 더 어렵게 진행된 뒤의 시기였거나 약소 집단이어서 이들에게 미쳐지는 안보적 도전이 석장리 집단보다 더 심각하였기 때문으로도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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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8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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