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중섭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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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화가 이중섭

Ⅱ. 이중섭의 프로필

Ⅲ. 이중섭의 작품세계

Ⅳ. 이중섭의 친구들

본문내용

PAPER PAINTING』
가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10 x 15cm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11.5 x 15cm
8.5 x 15cm 8.5 x 15cm
10 x 15cm
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굵어 새긴 위에 물감을 바른 뒤 이를 닦아내 긁힌 부분에만 물감을 먹게하는 효과를 보았다. 서울에서의 개인전 목록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그는 50여점의 은지화를 출품했다. 오산 스승 임용련의 부인이자 화가인 백남순이 그 전람회장을 방문했을때 나눈 얘기를 백남순이 회상한 바에 의하면 오산 시절부터 이 방법으로 그리기 시작해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우리 미술의 특징의 하나로 상감기법을 개선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기법은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상태라 늘 갈망해 오던 이중섭에게 만족을 가져다 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음에 할 작품들의 밑그림으로 쓰려고 했다.
Ⅳ . 이중섭의 친구들
이남덕 (부인 : 야마모토 마사코(1921 ~ :한국 이름 이남덕) 여사와의 인터뷰내용 발췌.
어느날 학교 가운데 뜰에서 쉬는 시간에 남학생들이 배구 경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청년이었죠. 그 때는 그가 조선사람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그는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요, 권투도 잘 했고 철봉, 뜀박질 등을 멋있게 해냈죠, 그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가창력이 뛰어났고 제법 정통적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마 저 뿐만아니라 다른 여학생들도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실기수업이 끝나고, 붓으 빨게 되었는데 옆에서 그도 붓을 빨고 있었죠, 그때 우리들은 단 둘 뿐이었습니다. 그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어요, 그 때부터 다방같은 데에서 자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보들레르라든가 발레리, 릴케, 베를렌느 등의 시를 암송으로 들려주곤 했죠. 그는 소설보다는 시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어떤 때는 리케의 시귀를 아주 정갈하게 베껴서 준 적도 있어요. 외우라는 뜻어었는지는 몰라도.... 인품이 좋았다고나 할까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뜻이고, 아주 품성이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피난지에서 까지 그랬어요. 학교시절에도 일본 친구들이 그의 하숙방을 찾아가 보면 방이 째떨이 속처럼 어지럽혀져 있는데도 그 한가운데에 난초가 자라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방주인은 외출 중이었고.... 그래서 친구들이 돌아오면서 역시 아고리상(턱이 좀 긴 편이었던 이중섭의 특징을 일컬어 턱을 가리키는 일본어에 이씨의 일본식 발음을 붙여 만든 것임)은 아고리상 다운 데가 있다고 서로 말했다는 얘길 들었어요.
김병기(1916 ~ ) 화가. (초등과정과 일본에서의 대학 과정을 이중섭과 같이 보냄. 월남하여 활동하다가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이중섭)는 누구에게나 애착을 주는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서양화 도입기에 있어서 가장 먼저 후진성을 탈피한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비록 서구적인 재료로 그림을 그렸을 망정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한 개성적이고 향토적인 작가였다. 힘차고 꾸밈없는 붓끝을 휘둘러서 자신의 숨소리와 꿈을 분명하게 엮었다. 결코 모방하려 하지 않았고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화폭에 옮겼을 따름이다. 그림의 소재도 그러려니와 재료도 그랬다. 그의 그림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세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서거는 한국 미술계의 커다란 손실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화가로서의 이중섭보다 인간 이중섭을 더 아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년은 처자도 다 버리고 동가식 서가숙하는 정말 어려운 생활이었음에도 그를 미워하거나 경원하는 이가 있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사랑했다. 그의 주위에는 누구 못지 않게 많은 지기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 '훌륭한 호가'를 만나기 원했으며, 그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곧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겸손하고 정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며 비록 가난에 시달릴 망정 그의 모습이나 언동에서도 품위를 잃은 적이 없다. 그는 위대한 화가이기에 앞서 진실된 인간이었다. '천사와 같이 천진하고 고운 마음씨" 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이 지상 생활에선 벌써 날개 부러진 천사 - 타고난 인품의 천진함은 어쩔 수가 없어서 혼탁한 사회와 번거로운 인정으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순도를 그 혼자만이 지키며 가야 했는지 모른다. 한 때 그는 주어진 조건으로부터 탈출하기를 기도한 적이 있었다. 가족과 더불어 안락한 보금자리를 꾸미기 위하여, 그리고 그가 언제나 소망해 오던 도불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첫발을 내디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돌아오고 말았고 또한 그러한 계획의 포기를 강요당했다. 그는 세상살이에 비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어서 번민과 고독의 외딴섬의 절망 속에서 죽어갔다. 확실히 그의 종말은 절망과 고독의 절정이었으리라. '이렇게 유명한 분인데 어떻게 아무도 몰랐을까요?' 이것은, 그의 임종 후 주인을 몰라 시체실에 사흘이나 방치되었던데 비하여 성대하게 올린 장례식을 보고 병원 측에서 한 말이고 전한다.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많은 친지들은 그의 비참한 생애를 애석해 하고, 그 맑은 마음씨를 그리워하며, 혹은 훌륭한 화우를 못내 아쉬워 애도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그땐 이미 그가 세상을 떠난 얼마후의 일이었다. 이중섭은 불행한 시대를 가장 진실하고 가장 열렬하게 산 인간의 표본이라 하겠다. 그의 생애에는 비약이 없다. 주어지는 조건을 고스란히 감수하면서 번민하고 몸부림친 한평생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그러한 고뇌의 표정이 알알이 새겨져 있다. 작품을 떠나서 그 인간을 말할 수가 없고, 인간을 떠나서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작품과 인간은 동시적이라고 할 특징이 있다. 예술가를 말함에 흔히 두 가지 유형을 지적한다. 가령 피카소에 있어서 그 인간됨을 논하기 보다 우선 작품만을 대하고서 그의 명성을 저울질 한다면, 모딜리아니의 경우는 정반대다. 어딘지 맑고 귀한 그의 작품에 앞서서 그 인간의 됨됨이를 말하게 되는 '사랑스러운 예술가' 이다. 이중섭은 말할 것도 없이 그 후자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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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12.03
  • 저작시기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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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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