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연대의 소작쟁의에 대한 일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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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소작쟁이의 발생원인과 배경

3. 암태도 소작쟁이

4. 북률 소작쟁의

5. 끝맺는 말

본문내용

은 예사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북률면은 일제의 식민화 과정의 표본과도 같은 곳이며 또 한국인의 항쟁도 격렬하게 전개된 곳이니 일제 침략기 한국 역사의 축소판과도 같은 고장이다. 더구나 나석주 의사에 의해서 동척지사가 폭탄세례를 받았으니 일제에 의한 식민화 과정과 한국인의 투쟁은 북률면 향토사에서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Ⅴ. 끝맺는 말
지금까지 일제하 농민운동사의 대표적인 소작쟁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암태도 소작쟁의와 북률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소작쟁의의 역사적 의미와 그에 덧붙여서 소작쟁의가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가 있었다.
첫째, 일제하 소작쟁의는 그 대상에 따라 한국인 지주에 대한 투쟁과 일제지주에 대한 투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한국인 지주와의 투쟁을 보면 1922년 12월 순천에서 경우처럼 1,6000명의 면민이 지주와 대항하다가 면이나 군 또는 주재소에 진정을 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일반적 형태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제 관헌의 개입으로 간부의 검거, 투옥 등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면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위에서도 주지한 바로 암태도 소작쟁의이다. 이렇게 단순한 소작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조선인 지주에 대한 투쟁은 투옥, 재판 등의 일제의 탄압을 낳게 되면서 농민운동을 정치적 성격으로 변화시키고 이것은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한 반제투쟁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둘째, 일본 지주와 일제 농자에 대한 소작쟁의는 당초부터 조선인 토착 지주와의 소작쟁의와는성격을 달리한다. 식민통치에 대한 민족 항쟁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때문에 그 투쟁방법도 훨씬 철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북율 소작쟁의이다.
셋째, 소작쟁의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실시된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의 식민지 농업정책의 생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많은 국유지를 수탈하였으며 농민들의 소유권은 물론 관습상의 농작권 등 제권리를 박탈, 삭감시킴으로써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또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식민지 농업정책 기반을 굳건히 하는데 성공한 일제는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어 더 많은 소작농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토지조사사업 전후 또는 진행과정에서 개별 분산적으로 있었던 농민들의 저항은 본격적인 소작쟁의하는 조직적인 농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넷째, 소작쟁의의 원인은 고율의 소작료와 소작권 이동에 대한 항쟁이 대표적이다. 소작료의 고율화 현상은 봉건적 지배조건의 소산이 아니라 일제하 식민지 농업정책이 가져온 결과라 하겠다. 소작인들의 부담은 소작료 외에도 관리들의 중간착취, 종자대금, 토지수리비와 지주들이 부담하게 되어있는 짓, 제공과금, 그리고 비료대, 농기구대, 소작료 운반비, 운반도중 위험부담, 수리 조합비, 수세, 汰세, 제언. 태이 설비 및 보수비 부담, 검견의 수수료, 추곡원의 접대비, 두세의 두량비, 조제장소의 사용료, 지주, 사음에의 증여 등 실 소작료는 85.9%가 되었고 이외에도 소작인들은 미리 소작료를 내는 선대의 부담과 지주. 사음집의 청소, 수리와 관혼상제시 노역제공이 있어 착취에 시달리는 것에 대한 항쟁이었다. 여기에다 춘궁기 농민들은 지주에게 돈을 빌려 비싼 곡식을 사 먹고 추수기에 싼값의 곡식을 팔아 돈으로 갚아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수탈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소작기간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의 선발달로 토지에 비해 농민의 수가 많아 이런 열악한 여건에서도 농사를 짓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하였기 때문이다. 1920년대 소작기간이 1년인 경우가 7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소작쟁의의 원인도 초기에는 소작료에 대한 저항에서 소작권이동으로 옮겨 간 것이다.
다섯째, 1920년대의 소작쟁의는 해가 거듭될수록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1922년에는 24건에 2,539명이 1929년에는 1,590건에 4,863명이 증가하였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소작쟁의의 건수는 3,398회로 나타나 매년 평균 680건에 이르고 있어 이것은 소작쟁의의 격렬함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1920년대의 소작쟁의는 경제저항의 차원을 넘어서서 독립운동으로서의 쟁의로 승화하였다. 초기의 소작쟁의는 소작료, 소작권이동 등 순수한 경제 투쟁으로 시작되고 있지만 중반기에 들면서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고 있다.
황해도 북률면의 소작쟁의의 결과 390호나 이 곳을 떠나게 되자 이 곳 출신이 遁나석주가 이 소식을 듣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투탄한 것을 봐도 항일적인 성격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920년대의 소작쟁의는 경제저항에서 출발하고 있다.
1920년대의 소작쟁의는 지역적인 소작 운동이 아닌 억압 수탈당하는 한민족의 민족 항쟁으로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參 考 文 獻
1. 書 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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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 , 『토지조사사업연구』, 지식산업사 , 1977.
이우재 , 『한국농민운동사』, 한울 , 1986.
한길사 , 『한국사』13권.15권 , 서울 , 1994.
박순동 , 『암태도 소작쟁의』, 청년사 , 1988.
권두영 , 『일제하의 한국농민운동』「한국 근대사론」Ⅲ, 1985.
嶺八郞 , 『韓國拓植參考資料』, 1908.
김용섭 , 「한말 일제하의 지주제」,『한국 근대사론』Ⅰ, 지식산업사.
토지개량조합연합회,「토지개량사업 20년사」,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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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건 ,「1920년대의 한국농민」,「건대사학」, 제2집 , 1972.
2. 論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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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 「1920년대 농민운동과 그 성격」, 전남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1994.
강훈덕 , 「일제하 소작쟁의의 성격에 대한 一考察」,『韓國史叢論』4 ,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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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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