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세기 동아시아 불교사서의 언어적 특성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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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 리 말

2. 한국의 {三國遺事}

3. 일본의 {傳光錄}

4. 월남의 {禪苑集英}

5. 마 무 리

본문내용

선택이었을 것인데, 『선원집영』을 보면 제3의 길을 택한 듯이 보인다. 즉, 『선원집영』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한시체로 극복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차피 시적인 언어를 필요로 한다면, 그리고 관습화된 인식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시되었다면, 시어와 시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월남인에게 한시는 고답적인 표현 수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한시의 수용을 통해 자국어 내지는 일상어를 대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설은 월남의 국음시와 연관지어볼 때 설득력이 있다.
월남의 국음시는 우리의 향가나 일본의 화가와 상통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다만, 15세기의 시인인 완치에 의해 창안되어 비교적 늦은 시기에 등장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이 국음시는 한시의 절구와 율시를 그대로 본 떠 만든 것이다. 8행이거나 4행이고, 글자수는 7언이거나 5언이다. 운자나 평측에서도 한시와 다름없다. 이는 국음시를 한시와 대등한 것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시는 한문 소양을 지닌 이들만의 전유물이었으므로 그 향유와 전달의 범위가 상층 지식인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국음시는 굳이 읽을 수 없더라도 욀 수는 있었으므로 그 전달의 범위가 훨씬 넓었다. 비록 국음시가 한시에 비해 품격 높은 표현을 쓸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 사상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
)이상 國音詩에 대한 논의는 조동일·지준모, 『베트남 최고시인 阮 』, 서울: 지식산업사, 1992; 조동일, 『동아시아문학사비교론』, 서울: 서울대출판부, 1993, 348-51면; 조동일, 「한문학과 민족어문학,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 서울: 지식산업사, 1999 등을 참조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월남 선사들의 선문답에 7언이나 5언의 한시체가 풍부하게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는 자국어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陳朝의 선사인 慧忠의 어록인 『陳朝慧忠上士語錄』에서도 이 점은 입증된다. 어록이 일반적으로 전등록보다 훨씬 풍부한 구어나 일상어를 보여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慧忠의 어록에서도 문답에 줄곧 7언이나 5언의 한시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본고의 논지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一日師燕居, 次門僧侍立, 時有僧問: '啓咨上士爲生死事大, 無常迅速, 未審此身生從何來死從何去?' 師云: '長空縱使雙飛 , 巨海何妨一點 ."
선사들의 선문답에서 이루어진 표현이 국음시의 발달로 직결되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최소한 그 발상에 있어서는 상통하는 면이 발견된다.
『선원집영』에서의 이러한 표현방식은 『삼국유사』가 자국어화된 한문 표현을 쓰고 『전광록』이 한문과 자국어를 결합하여 표현한 것과 동일한 의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선원집영』은 그 전체적인 성격에서도 고승전과 전등록의 서술방식을 결합한 듯한 성격을 보여주지만,
)이에 대해서는, Cuong Tu Nguyen, ibid., pp. 24-35; 정천구, 「高僧傳 및 傳燈錄과의 비교를 통해 본 『禪苑集英』」, 『베트남 선사들의 이야기』, 서울: 민족사, 2001에서 자세한 고찰을 하였다.
선문답에서도 이중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선원집영』이 단순하게 중국의 전등록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독자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5. 마 무 리
중세 동아시아는 한문이라는 공동문어로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하였으며, 거기에 더하여 불교와 유교라는 종교와 이념도 공유하고 있었다. 주로 문명권 중심부인 중국에서 주변국으로 문화가 유입되었는데, 그 문화는 항상 창조적 변용을 겪었다. 이러한 양상은 정치·사회적으로 변동이 심하였던 13·4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3·4세기 동아시아 각국에서 일제히 불교사서가 편찬되면서 문명권의 동질성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변국보다 이른 시기에 『송고승전』과 『경덕전등록』이 편찬되었는데, 특히 전등록은 송대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편찬되면서 고승전에서 전등록으로의 전환을 확고히 하였다. 전등록은 구어체의 선문답, 게송 등으로 그 시적인 특성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언어 및 표현의 차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특히 구어체 문장은 공동문어에서 자국어로의 전환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언어의 변화는 주변국에서 편찬한 불교사서에서 확인된다.
한국의 『삼국유사』는 공동문어로 저술되었지만, 다양한 설화의 수용과 향가의 수록 등을 통해 정제되지 않은 한문―자국어화된 한문을 포함하여―을 구사하였다. 이는 충지의 시나 고려 말 보우의 선시 및 혜근의 향찰 시가로 이어짐으로써 중세후기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구실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국어를 사용하였으니, 전등록인 『전광록』에서는 한문과 자국어가 병용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자국어 역사서 서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월남의 『선원집영』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불교사서보다 훨씬 정제되고 세련된 한문이 구사되었는데, 여기에는 자국의 문화적 우월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선원집영』에도 자국어 시가의 흔적이 숨어 있다. 즉, 선문답이 구어체가 아닌 5언이나 7언의 한시체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자국어 시가인 국음시의 형식적 특성과 직결되는 것이다.
중국의 선이 사대부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기록문자에 매이게 되고 송대 이후로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구어체의 자국어 구사는 『주자어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송대 이후의 언어 표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이나 일본, 월남에서도 각기 독자적인 방식으로 불교사서를 편찬하면서 자국어 또는 자국어화된 표현을 적극 수용하였다. 이는 13·4세기 동아시아의 불교사적 전환이 언어를 통해 드러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언어, 특히 공동문어와 자국어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표현의 문제를 넘어 사상과 문화 일반의 변화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이를 13·4세기 불교사서를 통해 확인해 보았는데, 그것이 사상과 이후 불교사의 전개에서 어떠한 차이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는 미처 논의하지 못하였다. 이 점은 차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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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1.28
  • 저작시기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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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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