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적 행위로서의 웃음에 포함된 기본적인 요소를 명시한 데 불과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요소는 대부분의 경우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합으로 혼합된 양상을 보여준다. 즉 웃음에는 대개 이 두 요소가 같이 있다는 것이다. 웃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축제적 분위기란 일단 유쾌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것이 단순한 현실도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긴장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웃는 사람의 현실 인식이 갱생되어야 한다. 또한 풍자적인 웃음의 경우에도 대상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반드시 전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대상을 같이 보고 웃을 수 있는 공동체를 상정해야만 이 냉소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가장 단순한 종류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웃음과 냉소라는 양극단을 사이에 두고 풍자와 축제의 분위기가 각기 다른 비율로 혼합된 무수한 단계의 웃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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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냉소가 웃음의 어떤 기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결과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되었다. 냉소주의란 웃음의 풍자적 기능을 극단화하다 못해, 웃고 있는 자신 이외의 모든 대상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나아가 자기자신까지도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따라서 같이 즐거워하며 웃을 수 있는 ‘우리편’을 전혀 상정하지 않는 특이하고도 고독한 종류의 웃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건강한 웃음이 같이 웃는 동료 집단을 전제로 하고, 때로는 웃음거리가 되는 그 대상조차도 웃는 사람들의 축제적인 분위기에 덩달아 같이 웃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면 냉소란 어떤 극단적인 종류의 웃음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혼자 웃는 웃음, 현실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나 혼자 이편에 서서 웃는 웃음, 나아가서 ‘이편’에 서 있는 나 자신마저도 비웃는 웃음이 냉소인데, 여기서 우리는 현실 세계의 모든 규칙과 도덕률, 인간적 동기의 성실성을 불신하는 철학적인 사조로서의 시니시즘과 극한의 웃음으로서의 냉소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에는 문학작품이나 각종 매체에 냉소적인 웃음이 등장하는 데서 더 나아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확대되는 경향도 보인다. 이런 단계에 이르면 특정한 종류의 웃음을 유발한다는 의미는 거의 사라지고, 현실과의 거리감, 통상적인 경로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감, 그러면서도 그 모든 상황을 듣고 보고 있으며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지적인 우월감의 혼합이 다음과 같은 ‘냉소적’ 문학관의 극치를 낳게 된다.
시의 절대적인 왕국인 내면 세계는 ‘표현될 수 없음’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공기와 같다. 거기엔 진실도, 긴장도, 기온의 차이도 있지만, 내면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그 투명성이다. 그러면 이 내면 세계가 그 ‘표현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내면 세계는 교활한 꾀를 쓴다. 그것은, 그렇다, 바로 외적 현실에 관심이 있는 척하는 것이다. 거대한 국가가 몰락해? 내면 세계는 황홀하다. 주제가 생겼으니까! 죽음이 저 지평선 위에? 내면 세계는―스스로는 불멸의 존재라고 믿기에―흥분에 몸을 떤다. 전쟁? 끝내주는군. 고통? 아주 좋아. 나무 숲? 너무 활짝 피어버린 장미? 더 좋지. 현실? 브라보. 현실은 정말 필수적인 거야. 현실이 없다면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해.
시는 현실을 속이려고 한다. 시는 현실의 걱정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척한다. 뭘 안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도 한다. 시는 말한다, 오, 또 지진이군. 또 부정한 짓이야. 홍수, 혁명. 또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어버렸군.
시는 자기 비밀이 탄로날까봐 두렵다. 언젠가 현실은 시의 가슴이 차갑다는 걸 알아차릴지도 몰라. 시에게 감정 같은 건 없다는 걸, 오직 크게 뜬 눈과 잘 들리는 귀가 있을 뿐. 현실은 갑자기 자신이 시의 비유를 위한 무궁무진한 원천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러고 나면 현실은 사라지겠지. 그러면 시는 이 세상에서 말없이, 공허하게, 슬프게, 그리고 의사소통할 수 없는 상태로 홀로 남게 되겠지.
―「시의 더러운 비밀」 전문14)
냉소적인 웃음을 짓는 사람과 냉소의 대상이 되는 것 사이의 심리적 거리에서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유추해낸 이 에세이는 우리 시대 문학에서의 냉소주의, 나아가서 우리 시대의 문학 자체가 웃음을 유발하는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를 최대한으로 만들고 모든 현실적인 감정들을 오직 관찰자의 냉정함으로 바꾸어놓은 결과라는 것을 재치있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리감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혹자는 냉소란 ‘잔혹성과 정신적 상처(trauma)의 논리적 결과’라고 말한다.15) 80년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입은 크고 작은 상처―그것을 ‘상처’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증상인데―의 결과로 나온 것이 90년대의 냉소주의라면, 90년대의 가시적인 풍요를 일거에 빈 껍데기로 만들어버린 극심한 경제난, 치솟는 실업률과 범죄율, 부익부 빈익빈의 현실이 2000년대의 또다른 냉소주의를 만들어내리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 그것이 새로운 냉소주의가 될지, 아니면 전혀 다른 종류의 웃음이 될지 예측하기는 아직 이른 듯 싶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거리감, 모든 권위에 대한 불신, 웃음을 공유할 공동체의 부재, 관찰자 혹은 국외자로서의 냉정함, 감상주의의 배제―이 모든 것이 90년대의 웃음이 축제적 성격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차가운 웃음’이 되는 데에, 나아가서는 웃음 자체와도 거리가 멀고 심지어는 현실과도 거리가 먼 어떤 것이 되는 데에 작용한 요인들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냉소주의가 90년대 우리 문학의 특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문학의 웃음이―워낙에도 웃음이 흔치는 않았지만―아주 기이한 종류의 새로운 웃음으로 변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며, 또한 그것이 우리 시대의 어떤 ‘잔혹성’과 ‘상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으로 인해 곧 웃음이 아닌 어떤 것으로 되어버릴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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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냉소가 웃음의 어떤 기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결과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되었다. 냉소주의란 웃음의 풍자적 기능을 극단화하다 못해, 웃고 있는 자신 이외의 모든 대상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나아가 자기자신까지도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따라서 같이 즐거워하며 웃을 수 있는 ‘우리편’을 전혀 상정하지 않는 특이하고도 고독한 종류의 웃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건강한 웃음이 같이 웃는 동료 집단을 전제로 하고, 때로는 웃음거리가 되는 그 대상조차도 웃는 사람들의 축제적인 분위기에 덩달아 같이 웃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면 냉소란 어떤 극단적인 종류의 웃음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혼자 웃는 웃음, 현실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나 혼자 이편에 서서 웃는 웃음, 나아가서 ‘이편’에 서 있는 나 자신마저도 비웃는 웃음이 냉소인데, 여기서 우리는 현실 세계의 모든 규칙과 도덕률, 인간적 동기의 성실성을 불신하는 철학적인 사조로서의 시니시즘과 극한의 웃음으로서의 냉소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에는 문학작품이나 각종 매체에 냉소적인 웃음이 등장하는 데서 더 나아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확대되는 경향도 보인다. 이런 단계에 이르면 특정한 종류의 웃음을 유발한다는 의미는 거의 사라지고, 현실과의 거리감, 통상적인 경로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감, 그러면서도 그 모든 상황을 듣고 보고 있으며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지적인 우월감의 혼합이 다음과 같은 ‘냉소적’ 문학관의 극치를 낳게 된다.
시의 절대적인 왕국인 내면 세계는 ‘표현될 수 없음’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공기와 같다. 거기엔 진실도, 긴장도, 기온의 차이도 있지만, 내면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그 투명성이다. 그러면 이 내면 세계가 그 ‘표현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내면 세계는 교활한 꾀를 쓴다. 그것은, 그렇다, 바로 외적 현실에 관심이 있는 척하는 것이다. 거대한 국가가 몰락해? 내면 세계는 황홀하다. 주제가 생겼으니까! 죽음이 저 지평선 위에? 내면 세계는―스스로는 불멸의 존재라고 믿기에―흥분에 몸을 떤다. 전쟁? 끝내주는군. 고통? 아주 좋아. 나무 숲? 너무 활짝 피어버린 장미? 더 좋지. 현실? 브라보. 현실은 정말 필수적인 거야. 현실이 없다면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해.
시는 현실을 속이려고 한다. 시는 현실의 걱정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척한다. 뭘 안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도 한다. 시는 말한다, 오, 또 지진이군. 또 부정한 짓이야. 홍수, 혁명. 또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어버렸군.
시는 자기 비밀이 탄로날까봐 두렵다. 언젠가 현실은 시의 가슴이 차갑다는 걸 알아차릴지도 몰라. 시에게 감정 같은 건 없다는 걸, 오직 크게 뜬 눈과 잘 들리는 귀가 있을 뿐. 현실은 갑자기 자신이 시의 비유를 위한 무궁무진한 원천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러고 나면 현실은 사라지겠지. 그러면 시는 이 세상에서 말없이, 공허하게, 슬프게, 그리고 의사소통할 수 없는 상태로 홀로 남게 되겠지.
―「시의 더러운 비밀」 전문14)
냉소적인 웃음을 짓는 사람과 냉소의 대상이 되는 것 사이의 심리적 거리에서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유추해낸 이 에세이는 우리 시대 문학에서의 냉소주의, 나아가서 우리 시대의 문학 자체가 웃음을 유발하는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를 최대한으로 만들고 모든 현실적인 감정들을 오직 관찰자의 냉정함으로 바꾸어놓은 결과라는 것을 재치있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리감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혹자는 냉소란 ‘잔혹성과 정신적 상처(trauma)의 논리적 결과’라고 말한다.15) 80년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입은 크고 작은 상처―그것을 ‘상처’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증상인데―의 결과로 나온 것이 90년대의 냉소주의라면, 90년대의 가시적인 풍요를 일거에 빈 껍데기로 만들어버린 극심한 경제난, 치솟는 실업률과 범죄율, 부익부 빈익빈의 현실이 2000년대의 또다른 냉소주의를 만들어내리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 그것이 새로운 냉소주의가 될지, 아니면 전혀 다른 종류의 웃음이 될지 예측하기는 아직 이른 듯 싶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거리감, 모든 권위에 대한 불신, 웃음을 공유할 공동체의 부재, 관찰자 혹은 국외자로서의 냉정함, 감상주의의 배제―이 모든 것이 90년대의 웃음이 축제적 성격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차가운 웃음’이 되는 데에, 나아가서는 웃음 자체와도 거리가 멀고 심지어는 현실과도 거리가 먼 어떤 것이 되는 데에 작용한 요인들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냉소주의가 90년대 우리 문학의 특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문학의 웃음이―워낙에도 웃음이 흔치는 않았지만―아주 기이한 종류의 새로운 웃음으로 변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며, 또한 그것이 우리 시대의 어떤 ‘잔혹성’과 ‘상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으로 인해 곧 웃음이 아닌 어떤 것으로 되어버릴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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