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락원[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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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익스피어 전집》 권두에 게재됐다는 것만 봐도 그의 시재가 당시 식자간에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평생을 성직자로서 종교계에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으나, 당시의 타락한 교회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점차 문학으로써 위대한 명성을 남기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이런 결심이 굳어졌기에 그는 켐브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자(1632), 곧 부친이 은퇴하고 있던 호튼으로 와 약 5년 동안 고전을 연구하며 창작에 열중했다. 초기 걸작으로서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는 주요한 작품들, 《유쾌한 사람》《침울한 사람》《코머스》 등이 모두 이 무렵에 씌어졌다.
《코머스》 이후 약 3년 동안 자중하고 붓을 들지 않았다. 그때 마침 1637년 8월에 대학 시절의 친우요, 장래가 촉망되던 시인이요, 학자인 에드워드 킹(1612∼37)이 아일랜드 해협에서 익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선집을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밀턴은 이에 목가적인 애가 〈리시더스(Lycidas)〉를 썼다. 밀턴은 친구의 죽음 속에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고 인생의 허무를 체험했던 것이다.
호튼에서 비교적 한가한 생활을 끝마치고,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 것은 1638년 4월이었다. 밀턴은 이 여행에서 만소와 실명한 노천문학자 갈릴레오를 만났다. 거기에서 다시 그리스 여행을 떠나려 했을 때 국내에서 제1차 감독전쟁인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밀턴은 그리스 여행을 중단하고, 외유 1년 3개월만인 1639년 7월말 경에 귀국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내란은 평정되어, 그는 런던에 사숙을 열고 조카들을 가르치며 조용히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러나 1640년에 제2차 감독전쟁이 터져 결국 영국군은 대스코틀랜드전 에서 대패했다. 장기 의회가 소집되고, 그의 옛 은사였던 토머스 영이 국교회와 싸우게 되자, 이에 자극받은 밀턴은 귀국한 지 2년만에 논단에서 자유를 절규, 논쟁과 정쟁의 와중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이 당시에 그는 종교적 자유, 가정적 자유, 정치적 자유를 제창하는 수편의 산문을 썼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언론출판의 자유를 주창한 글 《아레오파기티카》이다.
1645년 6월 이후 전세는 급전하여 왕당파가 패배하니, 잔존 의회는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찰스 1세를 폭군·살인자·국가의 적이라는 명목 아래 사형했다. 드디어 영국은 공화국임을 선포하게 되었고, 1660년의 왕정복고까지 11년간 영국을 지배하게 된다. 왕이 처형되고 공화 정부가 수립되자, 밀턴은 크롬웰의 라틴어 비서관으로 발탁되어, 주로 외교문서의 번역과 대외적 선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 격무로 해서 결국 그는 그나마도 불완전했던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와 같이 밀턴은 약20년간을 정치를 위하여 그 아까운 시재를 낭비했다. 그러나 그의 20여 년간의 정치적 체험은 후기의 대작을 쓰는 데 있어서 유익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 메리가 죽은 후 홀몸으로 있던 밀턴은 1656년 11월에 캐더린 우드콕과 재혼했으나, 불행하게도 그는 1년만에 죽었다. 마침내 많은 사람들의 원성의 대상이었던 크롬웰이 1657년 9월에 병사하게 되자, 청교도혁명도 종말을 고하고, 드디어는 찰스 2세가 런던으로 돌아와 왕정이 복구되었다.
왕정복고 후 밀턴의 이름이 사형수나 그 밖의 처형을 받을 사람들의 명단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공화정부의 대변인역을 맡아본 그의 활약상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기이하게 생각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라틴어 비서의 조수였던 앤드루 마블과 찰스 2세의 총신이요 사가였던 에드워드 하이드 등 몇 사람의 주선과 구명운동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의 주변에는 딸 셋과 생질인 에드워드 필립스, 그리고 몇 친구들만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밀턴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처지를 동정하여 그의 친구였던 패지트 박사는 자기 친척의 딸을 소개해 주며 그에게 결혼을 권유했다. 상대는 엘리자베드 민셜로 당시의 나이는 24세였다. 그녀는 30세나 연상인 눈먼 남편을 충실히 받들었으며, 밀턴의 이 세 번째 결혼은 더없이 행복했다. 그는 만년에 통풍으로 고생하다 1674년 11월 8일에 자기 방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볼 때, 비교적 한가한 호튼 생활을 빼놓고는, 그의 생애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그의 가장 쓰라린 시련의 경험은 세 방면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가정의 문제요, 그 둘째는 정치의 문제요, 그 셋째는 육체의 문제였다.
인생의 삶에 있어서 결혼은 최대의 축복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최대의 암초가 될 수 있다. 밀턴은 한마디로 말해서 결혼생활의 실패자였다. 한 번도 어려운 결혼을 세 번씩이나 하였고, 말년에는 딸들의 학대까지 받았으니, 그에게 있어서 가정은 실로 시련의 광장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치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약 20여 년의 정치생활에 온갖 정열을 다 쏟았지만, 1660년 5월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자유 공화국의 꿈은 깨지고 말았고, 사형은 면했다고 하나 크롬웰 밑에서 일해온 그였으니 영어의 생활만은 면할 길이 없었다. 그는 이와 같이 가정적으로 실패했고 정치계에서도 쫓겨났다.
이런 그에게 있어서 최후의 보루는 육체뿐이었다. 그러나 가혹한 시련은 그것으로 발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 밀턴의 시력은 약한 편이었지만 과도한 독서와 지나친 과로로 그는 44세(1652)라는 나이에 완전히 시력을 상실했다. 또한 고질병인 통풍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이러한 실명과 통풍은 그에게 있어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때 은혜의 신까지도 의심하고 욥처럼 항변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이런 정말과 고독의 심연에서 새로운 영적인 빛을 보게 되었고, 신앙생활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분연히 일어나 대오의 길로 나섰으며, 그 결과 《실락원》《복락원》《투사 삼손》같은 불후의 거작들을 남겨 놓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후기의 작품들 속에는 20여 년간의 피어린 투쟁과 쓰라린 경험, 말하자면 그의 인생 자체가 투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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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6.29
  • 저작시기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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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7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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