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종교언어와 종교행위
3. 언어의 수행적 기능
4. 공자의 새로운 인간관 : 의례적인 존재
5. 논어와 분석철학
6. 영원한 현대인으로서의 공자
7. 몇 가지 교훈 : 맺음말을 대신하여
2. 종교언어와 종교행위
3. 언어의 수행적 기능
4. 공자의 새로운 인간관 : 의례적인 존재
5. 논어와 분석철학
6. 영원한 현대인으로서의 공자
7. 몇 가지 교훈 : 맺음말을 대신하여
본문내용
를 간접적으로 유도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서양의 이원론일 뿐이다.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일 뿐이다. 물론 예는 대개 어떤 몸짓이나 언어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몸짓이나 언어는 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의례적인 행위 자체인 것이다.
특이한 방법으로 도덕적이면서도 우리들의 행위를 구속할 수 있는 의례적 몸짓이나 행위는 의례를 떠나서 추상화될 수 없다. 이렇게 공자에게 있어서 인과 예는 활동적이며, 그들은 결코 이원론적이거나 기계적이 아니다. 그리고 공자의 이런 주장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성서의 사상과 일치한다.
같은 글, p. 3.
여기서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단 말인가? 인이 바로 예고, 예가 바로 인이 아닌가? 분명히 『논어』는 인이 없는 예의 잘못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나는 우선 오스틴이 복잡한 일상언어의 수행적 기능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마지막에 언급한 한 구절을 소개하겠다. 그는 '수행적'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단어며 보기싫은단어'며 굉장히 심오한 단어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글을 맺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행적인 기능, 부적절성, 확실히 수행적인 기능, 그리고 끝으로 간단히 언설의 힘에 대한 상념들을 고찰했다. 여기서 나는 이 모든 작업이 약간 아무런 보상이 없으며(unremunerative) 약간 복잡하게(complicated) 보인다고 감히 말하겠다.
그러나 나는 어떤 면에서는 아무런 보상이 없지만 다른 면에서는 보상이 꼭 있다고 추측한다. 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면, 적어도 우리는 철학에 나타난 몇 가지 실수를 청산할 수 있다; 결국 철학이란 희생양으로 사용되며, 그래서 철학은 실로 모든 사람의 실수를 실수라고 전시한다. 또한 우리는 문법의 몇 가지 실수를 청산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은 조금 더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복잡하다고? 물론 이것은 약간 복잡하다. 그러나 삶과 진리와 사물은 복잡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철학자들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지나친 단순화가 철학자들의 질병이라는 말은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하여 내심 의심을 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다.
Austin, 앞의 글, pp. 251-252.
첫째, 이 인용문에서 오스틴은 자신의 일상언어 분석이 철학과 문법의 '몇 가지 실수'를 청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겸손한 표현이다. 그의 분석은 철학과 문법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그의 분석은 언어와 철학에 대한 전혀 새로운 그래서 혁명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접근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어느날 필자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우주의 모든 진리를 깨달았다. 이제부터 나는 이 진리에 따라서 살겠다"고 선언했다고 하자. 사람들은 나의 이 선언에 감동을 받으면서, 일단 나의 선언을 오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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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내적·정신적 행위의 외적·가시적 (즉 언어적) 기호'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은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어떤 마음의 상태인가, 그리고 우주의 진리를 따라 살겠다고 선언하는 황필호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일까 등을 질문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발견한 진리의 내용은 너무나 오묘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 진리를 따라서 사는 삶도 너무나 오묘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답변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황필호의 현재 내적 심리상태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다"거나 "우리는 그의 심정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우리는 앞으로 황필호가 어떤 삶을 영위할 지를 전혀 예언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지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의 의도의 표현에 나타난 예언이 (예를 들면, "나는 5시에 떠나겠다"는 예언이) 반드시 현실화될 필요는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알 수도 있다(제2부, pp. 223- 224).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앞의 선언을 한 황필호의 진정한 의도는 그만이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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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며,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된다. 이런 주장은 아직도 '내적인 마음'과 '외적인 언어'라는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선언한 새로운 삶이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반드시 현실화되어야 나의 선언의 진위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나의 행동을 보면서 과연 내가 그런 새로운 삶을 영위할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예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일단 나의 선언을 수행명제로 받아들이고, 이런 언어를 가능하게 한 구체적인 행위를 나에게서 찾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선언을 하기 이전의 나의 행위와 그 이후의 행위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면, 사람들은 일단 이 선언을 한 필자의 언어가 부적절한 수행명제며, 그래서 필자는 다시 오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위증자들, 사기꾼들, 중혼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예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언어와 철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인 것이다.
둘째, 앞의 인용문에서 오스틴은 삶과 진리와 사물은 언제나 복잡하지만 철학자들은 자신의 조그만 시각으로 언제나 삶과 진리와 사물을 단순화시키는 질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논어』에 나타난 인과 예의 관계를 서양의 이원론적인 정신과 육체, 신앙과 의례의 관계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만약 필자의 분석이 옳다면, 우리는 공자에 대해서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공자에 대한 나의 분석이 옳다고 해도, 그것이 쓸데없이 복잡하면서도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는 바로 단순화의 질병을 앓고 있는 철학자들 중에 한 사람이 아닐까.
특이한 방법으로 도덕적이면서도 우리들의 행위를 구속할 수 있는 의례적 몸짓이나 행위는 의례를 떠나서 추상화될 수 없다. 이렇게 공자에게 있어서 인과 예는 활동적이며, 그들은 결코 이원론적이거나 기계적이 아니다. 그리고 공자의 이런 주장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성서의 사상과 일치한다.
같은 글, p. 3.
여기서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단 말인가? 인이 바로 예고, 예가 바로 인이 아닌가? 분명히 『논어』는 인이 없는 예의 잘못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나는 우선 오스틴이 복잡한 일상언어의 수행적 기능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마지막에 언급한 한 구절을 소개하겠다. 그는 '수행적'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단어며 보기싫은단어'며 굉장히 심오한 단어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글을 맺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행적인 기능, 부적절성, 확실히 수행적인 기능, 그리고 끝으로 간단히 언설의 힘에 대한 상념들을 고찰했다. 여기서 나는 이 모든 작업이 약간 아무런 보상이 없으며(unremunerative) 약간 복잡하게(complicated) 보인다고 감히 말하겠다.
그러나 나는 어떤 면에서는 아무런 보상이 없지만 다른 면에서는 보상이 꼭 있다고 추측한다. 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면, 적어도 우리는 철학에 나타난 몇 가지 실수를 청산할 수 있다; 결국 철학이란 희생양으로 사용되며, 그래서 철학은 실로 모든 사람의 실수를 실수라고 전시한다. 또한 우리는 문법의 몇 가지 실수를 청산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은 조금 더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복잡하다고? 물론 이것은 약간 복잡하다. 그러나 삶과 진리와 사물은 복잡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철학자들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지나친 단순화가 철학자들의 질병이라는 말은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하여 내심 의심을 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다.
Austin, 앞의 글, pp. 251-252.
첫째, 이 인용문에서 오스틴은 자신의 일상언어 분석이 철학과 문법의 '몇 가지 실수'를 청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겸손한 표현이다. 그의 분석은 철학과 문법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그의 분석은 언어와 철학에 대한 전혀 새로운 그래서 혁명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접근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어느날 필자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우주의 모든 진리를 깨달았다. 이제부터 나는 이 진리에 따라서 살겠다"고 선언했다고 하자. 사람들은 나의 이 선언에 감동을 받으면서, 일단 나의 선언을 오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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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내적·정신적 행위의 외적·가시적 (즉 언어적) 기호'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은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어떤 마음의 상태인가, 그리고 우주의 진리를 따라 살겠다고 선언하는 황필호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일까 등을 질문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발견한 진리의 내용은 너무나 오묘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 진리를 따라서 사는 삶도 너무나 오묘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답변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황필호의 현재 내적 심리상태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다"거나 "우리는 그의 심정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우리는 앞으로 황필호가 어떤 삶을 영위할 지를 전혀 예언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지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의 의도의 표현에 나타난 예언이 (예를 들면, "나는 5시에 떠나겠다"는 예언이) 반드시 현실화될 필요는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알 수도 있다(제2부, pp. 223- 224).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앞의 선언을 한 황필호의 진정한 의도는 그만이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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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며,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된다. 이런 주장은 아직도 '내적인 마음'과 '외적인 언어'라는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선언한 새로운 삶이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반드시 현실화되어야 나의 선언의 진위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나의 행동을 보면서 과연 내가 그런 새로운 삶을 영위할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예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일단 나의 선언을 수행명제로 받아들이고, 이런 언어를 가능하게 한 구체적인 행위를 나에게서 찾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선언을 하기 이전의 나의 행위와 그 이후의 행위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면, 사람들은 일단 이 선언을 한 필자의 언어가 부적절한 수행명제며, 그래서 필자는 다시 오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위증자들, 사기꾼들, 중혼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예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언어와 철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인 것이다.
둘째, 앞의 인용문에서 오스틴은 삶과 진리와 사물은 언제나 복잡하지만 철학자들은 자신의 조그만 시각으로 언제나 삶과 진리와 사물을 단순화시키는 질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논어』에 나타난 인과 예의 관계를 서양의 이원론적인 정신과 육체, 신앙과 의례의 관계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만약 필자의 분석이 옳다면, 우리는 공자에 대해서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공자에 대한 나의 분석이 옳다고 해도, 그것이 쓸데없이 복잡하면서도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는 바로 단순화의 질병을 앓고 있는 철학자들 중에 한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