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 말
2. 문제를 보는 시각
4. 기독교와 제사의 갈등을 초래하는 바탕
5. 문제를 푸는 길
2. 문제를 보는 시각
4. 기독교와 제사의 갈등을 초래하는 바탕
5. 문제를 푸는 길
본문내용
깊이 그리고 넓게 그 갈등의 바탕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지엽적인 문제를 수용하거나 정화하거나 성화시킨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5. 문제를 푸는 길
그러면 이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한국의 기독교가 신 지향적인 종교성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제사를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러한 우주-지향적 종교성을 어떻게 읽고,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제사의 문제는 우리 나라의 기독교,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서
양에는 없는 그러한 문제 때문에 우리의 기독교가 이렇게 시달리고 있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넓게 멀
리 보면 이것은 우주-지향적 종교성을 끌어안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 자체의 문제이고 기독교가 스스로 지니
고 있는 문화적 한계 때문에 불가피하게 직면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우주-지향적 종교성이 신-지향적
종교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상응하는 진지성을 가지고 논의해야 합니
다. 기독교를 어떻게 토착화시켜야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종교문화가 새로운 신-지향적 종
교성을 어떻게 읽고,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도 아울러 추구하고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가피하게
그것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상황이 이러하다면 제사문제는 근원적인 문제의 한 단면, 또는 작은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
지 않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제사에 대한 문제는 실은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모든 죽음에 관한 물음
은 삶에 관한 문제이고, 삶에 관한 문제는 생명에 관한 문제로 그리고 마침내 존재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
다. 그렇다면 제사문제를 제사문제로만 논의하는 것은 존재자체에 대한 분명한 해답과 연계되지 않은 것일 때
아무런 보람도 초래할 수 없는 물음에 매달려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자기 나름의 답변을 마련하여 그 물음들의 연쇄 끝에 신을 두어 모든 해답을 완결합니다. 그리
고 우리의 전통적인 경험은 그 물음들의 끝에 우주-지향적 종교성을 자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같은 두 다른 종교문화의 유형을 익숙하게 경험해왔습니다. 종교사는 그러한 유형의 종교들이 지속하고 있는
나름의 속성들이 현대의 문화정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그러한 모습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
적합성 여부조차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신-지향적 종교문화가 봉착한 심각한 딜레마는 자신의 자기주장의
논리 안에 '자연의 이법(理法)'을 결여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고, 우주-지향적 종교문화의 심각한 갈등
은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존재의 인격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지향
적 종교문화의 에토스와 우주-지향적 종교문화의 에토스를 인간-지향적 종교문화의 에토스 안에 수렴하여 나아
가는 일을 현실적인 과제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문제의 해결은 제사문제에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제사문제는 기독교가 우주-지향적 종교문화의
에토스를 어떻게 읽고,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태도로 다듬는다면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는 사소한 일일 수밖
에 없는 그러한 문제일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자체를 끝내 중요하고 궁극적인 문제
로 여겨 그 문제에 대한 해답만을 모색한다면 제사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결국 그러한 문제제기 및 문제해결의
태도는 전제적 태도에 종착하고 말 것인데, 그것은 실은 지극히 비종교적이고 반종교적인 태도입니다. 결과적
으로 '복음'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메타노이아(metanoia, 회개)'의 선포에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기독교 복음의 출발이 없습니다. 제사문제를 보는 시각, 그 문제를 풀려는 출발점은 기독교 역사가
어떤 과오를 범했는가를 살피는 자리여야지, 그것을 간과한 채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
느님께 영광)'만을 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기독교가 기독교이기를, 제사가 제사이기를 주장하는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출구는 없습니다. 기
독교가 수용한 제사는 이미 제사가 아닐 것이고 또 기독교가 제사를 수용하면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닐 테니
까요. 그러나 기독교가 제사를 빙자해 박해했다는 과오를 승인한다면, 이것만 회개한다면 거기에 출구가 있
지 않을까요? 그 과오를 승인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고, 그 과오를 회개하지 않는 한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 가능성이란 기독교가, 제사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바뀌는 것은 두려워할 것
이 아닙니다. 변화는 생명의 현상인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변하는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
은 바뀌어집니다. 바야흐로 단절되고 소원했던 여러 문화권은 점차 서로 소통하고 혼합되고 있습니다. 새로
운 종교성의 탄생은 불가피한 필연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러한 고백을 처음 발언할 수 있는 축복받은 사람
들인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제사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가능성의 조짐이라고 여겨지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바뀌어져야 하는가 여기서부터는 신학자들이 할 일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단지 그것이 영혼이냐 아니냐 등에 집착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참 문제
가 아닐 것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모르지만 제사에 관해 중요한 것은 종교성 자체가 다른 문화, 다른 역사의
맥락에서 출발한 진지한 인간의 몸짓을 짓밟아 버린 과오를 고백하는 데서부터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할 것 같
습니다. 그렇게 출발한다면 갑자기 제사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닌 지경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요? 절을 해야 하
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그 자리에서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사를 지내야 하
는 죽음의 자리에서 그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문제 아닌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로 지엽적인 문제를 수용하거나 정화하거나 성화시킨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5. 문제를 푸는 길
그러면 이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한국의 기독교가 신 지향적인 종교성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제사를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러한 우주-지향적 종교성을 어떻게 읽고,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제사의 문제는 우리 나라의 기독교,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서
양에는 없는 그러한 문제 때문에 우리의 기독교가 이렇게 시달리고 있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넓게 멀
리 보면 이것은 우주-지향적 종교성을 끌어안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 자체의 문제이고 기독교가 스스로 지니
고 있는 문화적 한계 때문에 불가피하게 직면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우주-지향적 종교성이 신-지향적
종교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상응하는 진지성을 가지고 논의해야 합니
다. 기독교를 어떻게 토착화시켜야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종교문화가 새로운 신-지향적 종
교성을 어떻게 읽고,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도 아울러 추구하고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가피하게
그것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상황이 이러하다면 제사문제는 근원적인 문제의 한 단면, 또는 작은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
지 않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제사에 대한 문제는 실은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모든 죽음에 관한 물음
은 삶에 관한 문제이고, 삶에 관한 문제는 생명에 관한 문제로 그리고 마침내 존재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
다. 그렇다면 제사문제를 제사문제로만 논의하는 것은 존재자체에 대한 분명한 해답과 연계되지 않은 것일 때
아무런 보람도 초래할 수 없는 물음에 매달려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자기 나름의 답변을 마련하여 그 물음들의 연쇄 끝에 신을 두어 모든 해답을 완결합니다. 그리
고 우리의 전통적인 경험은 그 물음들의 끝에 우주-지향적 종교성을 자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같은 두 다른 종교문화의 유형을 익숙하게 경험해왔습니다. 종교사는 그러한 유형의 종교들이 지속하고 있는
나름의 속성들이 현대의 문화정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그러한 모습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
적합성 여부조차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신-지향적 종교문화가 봉착한 심각한 딜레마는 자신의 자기주장의
논리 안에 '자연의 이법(理法)'을 결여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고, 우주-지향적 종교문화의 심각한 갈등
은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존재의 인격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지향
적 종교문화의 에토스와 우주-지향적 종교문화의 에토스를 인간-지향적 종교문화의 에토스 안에 수렴하여 나아
가는 일을 현실적인 과제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문제의 해결은 제사문제에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제사문제는 기독교가 우주-지향적 종교문화의
에토스를 어떻게 읽고,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태도로 다듬는다면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는 사소한 일일 수밖
에 없는 그러한 문제일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자체를 끝내 중요하고 궁극적인 문제
로 여겨 그 문제에 대한 해답만을 모색한다면 제사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결국 그러한 문제제기 및 문제해결의
태도는 전제적 태도에 종착하고 말 것인데, 그것은 실은 지극히 비종교적이고 반종교적인 태도입니다. 결과적
으로 '복음'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메타노이아(metanoia, 회개)'의 선포에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기독교 복음의 출발이 없습니다. 제사문제를 보는 시각, 그 문제를 풀려는 출발점은 기독교 역사가
어떤 과오를 범했는가를 살피는 자리여야지, 그것을 간과한 채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
느님께 영광)'만을 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기독교가 기독교이기를, 제사가 제사이기를 주장하는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출구는 없습니다. 기
독교가 수용한 제사는 이미 제사가 아닐 것이고 또 기독교가 제사를 수용하면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닐 테니
까요. 그러나 기독교가 제사를 빙자해 박해했다는 과오를 승인한다면, 이것만 회개한다면 거기에 출구가 있
지 않을까요? 그 과오를 승인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고, 그 과오를 회개하지 않는 한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 가능성이란 기독교가, 제사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바뀌는 것은 두려워할 것
이 아닙니다. 변화는 생명의 현상인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변하는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
은 바뀌어집니다. 바야흐로 단절되고 소원했던 여러 문화권은 점차 서로 소통하고 혼합되고 있습니다. 새로
운 종교성의 탄생은 불가피한 필연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러한 고백을 처음 발언할 수 있는 축복받은 사람
들인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제사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가능성의 조짐이라고 여겨지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바뀌어져야 하는가 여기서부터는 신학자들이 할 일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단지 그것이 영혼이냐 아니냐 등에 집착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참 문제
가 아닐 것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모르지만 제사에 관해 중요한 것은 종교성 자체가 다른 문화, 다른 역사의
맥락에서 출발한 진지한 인간의 몸짓을 짓밟아 버린 과오를 고백하는 데서부터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할 것 같
습니다. 그렇게 출발한다면 갑자기 제사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닌 지경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요? 절을 해야 하
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그 자리에서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사를 지내야 하
는 죽음의 자리에서 그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문제 아닌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