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초주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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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문제 제기
2. 실천으로서 종교
3. 신앙의 정당화로서 실천
4. 교회 공동체의 내적인 실천 : 침례(Baptism)
5. 교회 공동체의 외적인 실천 : 평화주의(Pacifism)
6. 소결론

본문내용

것은 현실적인 적합성이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 신원하, "존 Yoder의 재세례파적 사회윤리: 그의 교회공동체적 윤리를 중심으로," 「개혁신학과 교회」, 3호 (1993): 145-46.
이 세상의 온갖 불의와 야만적인 폭력으로 고통받은 선량한 사람들이 오로지 비폭력적 평화주의적 실천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불충해 보인다. 파괴적인 형태의 악한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때로는 칼을 사용할 수 있지 않는가?
이것은 폭력의 소극적인 유용성을 긍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칼을 사용하는 것이 악을 제거하고 평화를 정착하는데 기여하는가' 라고 되물을 수 있다. '평화를 위해 수반되는 폭력이 전쟁과 폭력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증진시키는가?' 하지만 폭력이 평화에 기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폭력과 전쟁이 평화를 위한 기여도는 없으며, 폭력으로 폭력을, 전쟁을 전쟁으로 중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 Ethics, 312-15.
폭력을 통하여 새로운 질서, 자유로운 사회가 올 것이라는 것은 위선이며 신뢰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 Ellul, 157.
폭력을 통해서 새로운 평화 질서 구축이 거짓된 환영이라면, 평화주의는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 McClendon은 평화주의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평화가 정착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지 않는다. 단 그것이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보는 Niebuhr의 견해를 부정한다. McClendon은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삶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 Ethics, 160-61.
이 말은 죄악된 현실에 너무 압도당한 나머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망각하거나 약화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와 신자의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첫째, 평화주의적 실천은 도피나 사회로부터 후퇴가 아니다. 기독교 평화주의의 성서적 정당성과 역사적 근거가 있음에도 평화주의는 도피주의자라는 인식이 각인되어있다. 그러나 비폭력 평화주의에 근거한 실천도 실천이지 왜 도피인가? 실천은 다양하다. 도피냐 책임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증인이 될 것인가?
) Ethics, 177.
둘째, 폭력과 전쟁의 정당성은 콘스탄틴적인 교회와 국가의 결탁에 기인한 것으로 교회의 실천 근거를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순종이 아니라 세상의 요구에 순응한 것이다. 평화와 전쟁의 문제는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결국 성서와 배치되는 견해를 갖게 되거나, 성서를 전쟁의 정당화하는 문서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 Ethics, 299.
그런 점에서 폭력과 전쟁의 정당화는 성서적 기초가 아닌 기초주의에 다름 아니다.
6. 소결론
그러나 McClendon의 실천 이해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그의 실천 이해에 대해 다음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하나는 누구의 실천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들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전자의 질문에 대해 McClendon은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McClendon이 종교 언어를 실천 행위로 간주하고, 더 나아가 Braithwaite와 달리 인지적 측면을 강조한 것에도 불구하고 사회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제시한 출애굽의 홍해 사건을 기념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노래에 나타난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편애하시는 하나님이시다.(출 14:13-14)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에 대한 마리아의 찬양 또한 경제적 부를 가진 자와 권력을 가진 자들을 심판하시고, 가난하고 힘없고 연약한 자를 높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칭송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은 애굽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였고,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실천의 개념은 객관적인 용어나 보편적인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당파성'(partiality)을 지니는 것이다.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실천을 하는 것이다. Austin에게서 보듯이 언어 자체는 수행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실천이고, 누구를 위한 실천인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한다. McClendon은 실천의 당파성 문제에 관해서는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의 질문, 즉 실천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해서 McClendon은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다원적 사회에서 확신에 따른 실천들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파악하고 조정할 수 있는 가는 다음 장인 "다원성으로서의 종교 언어"에서 다루고자 한다.
이상에서 종교 언어의 실천적 성격에 관한 논의를 간략히 요약하여 보자. 종교 언어가 실천 행위라는 것은 종교의 이해를 재정립하는 것을 말한다. 종교란 관념적인 추상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Braithwaite는 종교 언어를 도덕 언어로 이해한다. 그는 종교 언어를 도덕 언어와 같이 참과 거짓의 기준으로 그 의미를 분별할 수 없고, 단지 화자의 도덕적 의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종교 언어의 인지적 측면을 간과하였고, 화자의 의도로 환원하는 문제점을 보인다. 반면에 McClendon은 Austin의 화행 이론을 통해서 종교 언어는 그 자체가 실천하는 행위이며, 지시적 차원을 갖고 있어야 정당화될 수 있음을 잘 입증하고 있다. 종교 언어가 실천임을 예증하는 것이 침례이다. 침례는 구원의 표지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는 회상의 표지이며, 그 기억을 순종하는 행위를 통해 현재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는 예수의 구원사건을 신앙으로 고백하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 합당한 순종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하게 거부되어야 한다. 하지만 McClendon의 실천 개념은 공동체성이나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출애굽 사건이나 예수 사건이 가지는 가난한 자를 위한 실천의 개념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침례식에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체험하는 성례전<이 용어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사용할 수 있다.>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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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격3,300
  • 페이지수26페이지
  • 등록일2002.10.15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6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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