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5장. 반기초주의 신학의 다원성(Plurality) : 상대주의 없는 다원주의
1. 바벨탑인가? 오순절인가?<제국주의와 상대주의는 바벨탑, 관점주의는 오순절이라는 것을 설명할 것>
2. 다원적 상황에서 종교 이해 : 내재적 접근
3. John Hick의 종교 다원주의 비판
4. 다원적 사회에서 선교
5. 상대주의 없는 다원주의
6. 소결론
1. 바벨탑인가? 오순절인가?<제국주의와 상대주의는 바벨탑, 관점주의는 오순절이라는 것을 설명할 것>
2. 다원적 상황에서 종교 이해 : 내재적 접근
3. John Hick의 종교 다원주의 비판
4. 다원적 사회에서 선교
5. 상대주의 없는 다원주의
6. 소결론
본문내용
deism," Modern Theology vol. 5, no. 2 (January 1989): 87-111. Tilley가 정의한 상대주의적 신앙주의(relativist fideism)는 본 논문에서 다루는 상대주의와 일치한다. 그리고 Garrett Green 역시 통약불가능성은 이해 불가능성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 상상하기: 신학과 종교적 상상력」, 장경철 옮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90-92.
그러나 통약불가능하다는 것은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이나 비교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각 종교 전통마다 다르다. 자신들의 고유한 철학과 근거, 그리고 세계관을 통해서 고통을 파악한다. 그럼에도 다른 종교 전통에 있는 이가 다른 종교 전통의 고통에 대한 견해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교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건축이나 기술자의 경우 Newton 역학에 따라 일하는 것은 상식이지만, 천체물리학자는 Newton 패러다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Newton과 Einstein 패러다임 중에서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적절한 패러다임을 비교하고 선택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 것이다.
) Tilley, 90-91.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비록 종교들이 통약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비교하고 평가해야만 하는 종교들의 모든 규칙이나 모든 방법들을 선험적으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신념과 실천을 비교할 수 있다."
) Tilley, 93. Tilley는 선험적인(a priori)인 비교 기준은 없지만, 임시적인(ad hoc) 기준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Ibid., 94. 이러한 임시적인 변증학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William Werpehowski, "Ad hoc apologetic," The Journal of Religion 66 (1986): 282-301.
그러면 구체적으로 통약불가능하면서도 비교하고 이해 가능하다는 것의 증거는 무엇인가? McClendon은 인간 사회의 영속적인 세 가지 특징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첫째는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Witness, 297; Convictions, 150-154.
각 언어 놀이들 사용자간에는 번역을 통해서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번역이 완벽하지는 않다. 번역은 부정확하고 불완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완전한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 번역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완전한 번역은 번역의 목적이 아니다. "언어와 언어 놀이들은 외부자가 '채택'하는 것을 허용할 만큼 충분히 번역된다."
) Witness, 297.
각 종교의 언어 놀이들이 내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공통된 가치 기준에 따라서 통약할 수는 없지만, 번역의 경우에서 보듯이 실제적인 의사 소통은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는 각 공동체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치의 장소들'(loci of values)이 존재한다.
) Witness, 298; Convictions, 154-62.
예를 들어 이웃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자. 각 공동체는 이웃에 대한 상이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웃에 대한 보편적 개념은 불가능하더라도 호소할 수 있는 loci가 존재한다.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의 경우,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은 두 사람 사이의 이웃 개념이 상이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준에 호소하는 예수의 요구는 두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와 같은 개념에 대한 보편적 합의에는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진리'에 호소하는 것은 각 언어 놀이 안에서는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진리가 근대적 합리성을 유지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고 해도, 상대주의자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텅빈 개념은 아니다.
) Convictions, 157.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웃' '진리' 등과 같은 개념은 상호간의 의사 소통을 가능케 하는 자리인 것이다.
셋째, 반대하는 그룹들의 확신은 언어와 확신의 모체(matrix)인 사회 안에서 해결된다.
) Witness, 298-9; Convictions, 162-74.
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의 확신과 조우하게 되면 다양한 형태의 거부나 또는 수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편으로 개혁자들과 같이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응답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개종함으로 새로운 확신을 수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의 단계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진다. 바울의 회심을 살펴보면, 과거 유대교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 Convictions, 169-70.
바울의 하나님은 회심 이후의 하나님 이해가 회심 이전의 견해를 수정하기는 했지만,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연속성을 보여 준다. 하지만 유대교가 파악하지 못했던 이해를 개종을 통해서 더 확장하고 경계를 넓힌 점은 불연속성을 보여 준다. 과학사의 경우, 물질의 최소 단위로서 원자(atom)라는 용어로 쓰인 적이 있었지만, 다른 의미로 여전히 연속성을 가지면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은 종교와 패러다임 간의 충돌에 따른 변화는 연속적인 면과 불연속적인 측면이 모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이렇게 McClendon이 변화는 연속적이며 불연속이라는 것을 말하는 의도는 경쟁하는 패러다임이나 종교 간의 갈등 상황이 상대주의로 진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언어의 정당화가 다원주의 사회에서 상대주의로 함몰하지 않기 위해서는 공동체라라는 정당화의 자리를 인식해야 한다. McClendon은 신학의 다원주의적 성격이 자유방임이나 주관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신학이 항상 공동체의 신학이라는 것과 공동체 간의 상호 작용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 Ethcis, 36.
따라서 종교 언어의 정당화를 위한 비기초주의적 신학은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그리고 Murphy는 다원주의의 상대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공동체라고 말한다.(이것으로 다음 장 논의와 연결시킬 것)
6. 소결론
그러나 통약불가능하다는 것은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이나 비교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각 종교 전통마다 다르다. 자신들의 고유한 철학과 근거, 그리고 세계관을 통해서 고통을 파악한다. 그럼에도 다른 종교 전통에 있는 이가 다른 종교 전통의 고통에 대한 견해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교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건축이나 기술자의 경우 Newton 역학에 따라 일하는 것은 상식이지만, 천체물리학자는 Newton 패러다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Newton과 Einstein 패러다임 중에서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적절한 패러다임을 비교하고 선택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 것이다.
) Tilley, 90-91.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비록 종교들이 통약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비교하고 평가해야만 하는 종교들의 모든 규칙이나 모든 방법들을 선험적으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신념과 실천을 비교할 수 있다."
) Tilley, 93. Tilley는 선험적인(a priori)인 비교 기준은 없지만, 임시적인(ad hoc) 기준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Ibid., 94. 이러한 임시적인 변증학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William Werpehowski, "Ad hoc apologetic," The Journal of Religion 66 (1986): 282-301.
그러면 구체적으로 통약불가능하면서도 비교하고 이해 가능하다는 것의 증거는 무엇인가? McClendon은 인간 사회의 영속적인 세 가지 특징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첫째는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Witness, 297; Convictions, 150-154.
각 언어 놀이들 사용자간에는 번역을 통해서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번역이 완벽하지는 않다. 번역은 부정확하고 불완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완전한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 번역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완전한 번역은 번역의 목적이 아니다. "언어와 언어 놀이들은 외부자가 '채택'하는 것을 허용할 만큼 충분히 번역된다."
) Witness, 297.
각 종교의 언어 놀이들이 내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공통된 가치 기준에 따라서 통약할 수는 없지만, 번역의 경우에서 보듯이 실제적인 의사 소통은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는 각 공동체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치의 장소들'(loci of values)이 존재한다.
) Witness, 298; Convictions, 154-62.
예를 들어 이웃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자. 각 공동체는 이웃에 대한 상이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웃에 대한 보편적 개념은 불가능하더라도 호소할 수 있는 loci가 존재한다.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의 경우,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은 두 사람 사이의 이웃 개념이 상이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준에 호소하는 예수의 요구는 두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와 같은 개념에 대한 보편적 합의에는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진리'에 호소하는 것은 각 언어 놀이 안에서는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진리가 근대적 합리성을 유지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고 해도, 상대주의자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텅빈 개념은 아니다.
) Convictions, 157.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웃' '진리' 등과 같은 개념은 상호간의 의사 소통을 가능케 하는 자리인 것이다.
셋째, 반대하는 그룹들의 확신은 언어와 확신의 모체(matrix)인 사회 안에서 해결된다.
) Witness, 298-9; Convictions, 162-74.
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의 확신과 조우하게 되면 다양한 형태의 거부나 또는 수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편으로 개혁자들과 같이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응답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개종함으로 새로운 확신을 수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의 단계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진다. 바울의 회심을 살펴보면, 과거 유대교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 Convictions, 169-70.
바울의 하나님은 회심 이후의 하나님 이해가 회심 이전의 견해를 수정하기는 했지만,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연속성을 보여 준다. 하지만 유대교가 파악하지 못했던 이해를 개종을 통해서 더 확장하고 경계를 넓힌 점은 불연속성을 보여 준다. 과학사의 경우, 물질의 최소 단위로서 원자(atom)라는 용어로 쓰인 적이 있었지만, 다른 의미로 여전히 연속성을 가지면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은 종교와 패러다임 간의 충돌에 따른 변화는 연속적인 면과 불연속적인 측면이 모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이렇게 McClendon이 변화는 연속적이며 불연속이라는 것을 말하는 의도는 경쟁하는 패러다임이나 종교 간의 갈등 상황이 상대주의로 진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언어의 정당화가 다원주의 사회에서 상대주의로 함몰하지 않기 위해서는 공동체라라는 정당화의 자리를 인식해야 한다. McClendon은 신학의 다원주의적 성격이 자유방임이나 주관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신학이 항상 공동체의 신학이라는 것과 공동체 간의 상호 작용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 Ethcis, 36.
따라서 종교 언어의 정당화를 위한 비기초주의적 신학은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그리고 Murphy는 다원주의의 상대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공동체라고 말한다.(이것으로 다음 장 논의와 연결시킬 것)
6. 소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