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일본에서의 축구와 월드컵
2. 서포터와 히노마루와 기미가요
3. 나카타와 기미가요 소동
4. 서포터와 국기와 국가법 제정과의 관련
2. 서포터와 히노마루와 기미가요
3. 나카타와 기미가요 소동
4. 서포터와 국기와 국가법 제정과의 관련
본문내용
.
올림픽 혹은 국제적인 이벤트 등에서 흘러나오는 기미가요를 무엇이라고 외국 사람들에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역사는 있었지만, 「나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기미가요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자신과, 인정하는 다른 사람을 한데 묶어서 설명하고 있을까?
) www.miyazaki-nw.or.jp/soccer/htmfold/difficult4.html에서 인용(2002년 5월 25일).
다른 사람이 무엇을 선택했는가가 궁금하다는 차원을 넘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밝히라고 강요할 정도의 긴장감의 정체가 무엇인가는 본고의 과제를 벗어난 것이지만, 1990년대 말의 우경화 드라이브와 관련성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3) 국기·국가법의 제정과 축구
이상에서 확인한 축구 경기장에서의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복권은 전후 기회 있을 때마다 국기·국가법을 추진하려다 실패를 거듭했던 자민당을 비롯한 보수 정치가들의 눈에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로 비치지 않았을까. 그들이 히노마루·기미가요가 국기·국가라고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국민의 통념, 사회 관습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데 있었고, 그 '사회적 정착'을 위해 학교의 의식을 비롯한 각종의 상징의례에 도입하는 데 앞장서 왔다
) 中西信太郞, 「はためく日の丸のジャパネスク」, 『世界』 1999년 6월호, 岩波書店, 103쪽.
. 서포터들의 표현대로라면 법제화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느니 만큼, 이는 히노마루·기미가요를 국기·국가로 법제화해야 한다는 정부측의 명분에 힘을 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법제화가 성취된다면 더욱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해진다.
'문화기호론'에서는 "스포츠 등의 게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간의 의미 경험은 그 장에서의 플레이가 만들어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된다
) 이시다 히데타카(石田英敬) 도쿄대학 교수가 1999년 8월 3일 참의원 「국기·국가에 관한 특별위원회」에서 행한 참고인 진술. gamp.c.u-tokyo.ac.jp/~nulptyx/against.html에서 인용(2002년 5월 27일). 이하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마찬가지.
. 그리고 "축구의 서포터가 히노마루를 바디 페인팅 하고 열광하는 일과, 학교의 국기 게양의 의식화를 통해 「국민국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같은 심벌이 개입한 것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경험"이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자는 관객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상상 속에서 기껏 「히노마루 축구 팀」의 일원이 되는 정도의 상징적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후자는 「국민국가」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습성(에토스)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국가와 국민의 역사와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양자가 뒤섞여 수준이 혼란스러울 때 스포츠와 이벤트의 「정치 이용」이 이루어지게 된다.
자민당이 국기·국가법을 추진하게 된 정치적 함의는 위의 분석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1999년의 여름, 국기·국가법은 자위대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제고시키는 '주변사태법'과 함께 국회를 통과했다. 일본은 20세기의 마지막을 그렇게 정리했다.
나오며
이제 '가벼워진' 히노마루·기미가요와 내셔널리즘의 관련성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할 때다. 일본의 논조는 대부분 내셔널리즘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없이 깃발을 휘두르고 노래를 불렀다고 본다. "90분이 끝나고 나면 지금까지 히노마루를 흔들고 있던 사람도 지극히 보통의 국제 감각을 지닌 건전한 시민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라는 '90분의 내셔널리즘'론도 있다
) www.yung-web.com/essey/national.html에서 인용(2002년 5월 24일).
. 또 내셔널리즘의 완충제(ガス拔き)론도 있어, "스포츠인 한에는 해가 없으며, 거기서 놀고 있는 편이 내셔널리즘의 완충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한다
) www2s.biglobe.ne.jp/~mmr/glocal/98/0101_zazankai.htm에서 인용(2002년 5월 27일).
.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고 하면서, 축구와 나카타가 예로 등장하기도 한다.
축구 일본 대표를 응원하는 젊은 사람들이 큰소리로 기미가요를 부르고 히노마루를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진보파를 가끔 보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국립 경기장 안에 한정된 얘기이다. 과거 나카타 히데토시 선수가 대표전을 앞두고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민족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협박을 받고 있다는 말이 퍼졌을 때, 그들 대부분은 나카타 선수의 내면의 자유를 옹호하는 정도의 기량을 지니고 있다. 걱정할 일은 아니다.
) 安部誠, 「解雇願望を捨て去って勞 運動の明るい兆候をつかもう」, ユニオン·ニュス「ファイティングポズ」62호(2001년 2월 1일). www.ops.dti.ne.jp/~grapevin/union/union0006.html에서 인용(2002년 5월 29일).
하지만 국기·국가의 법제화 이후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혹자는 "정치적인 의미를 띄게 됨으로써 히노마루·기미가요가 소원해질지 모른다. 역으로 젊은이들이 내셔널리스틱하게 되어 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분석한다
) 앞의 기사, 『아사히 신문』 1999년 11월 26일 석간.
.
타자의 배제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복권은 현재까지는 일본이라는 틀 내에서만 작동하는 동일화의 메커니즘으로 보인다. 훌리건과 같은 노골적인 폭력으로 비화될 조짐도 현재로서는 감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재해석한 히노마루·기미가요의 경계선과 그 내실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래서 "경기장에서 히노마루를 휘두를 정도의 귀속의식과 국가의식을 바탕으로 성립할 것 같은 국가통합과 전쟁, 일체화야말로 현재의 글로벌 국가로서는 「강한 통합」이라 할 수 있"다는 지적에 공감이 갈 수밖에 없다
) 앞의 논문, 「はためく日の丸のジャパネスク」, 106쪽.
. 서포터의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올림픽 혹은 국제적인 이벤트 등에서 흘러나오는 기미가요를 무엇이라고 외국 사람들에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역사는 있었지만, 「나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기미가요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자신과, 인정하는 다른 사람을 한데 묶어서 설명하고 있을까?
) www.miyazaki-nw.or.jp/soccer/htmfold/difficult4.html에서 인용(2002년 5월 25일).
다른 사람이 무엇을 선택했는가가 궁금하다는 차원을 넘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밝히라고 강요할 정도의 긴장감의 정체가 무엇인가는 본고의 과제를 벗어난 것이지만, 1990년대 말의 우경화 드라이브와 관련성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3) 국기·국가법의 제정과 축구
이상에서 확인한 축구 경기장에서의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복권은 전후 기회 있을 때마다 국기·국가법을 추진하려다 실패를 거듭했던 자민당을 비롯한 보수 정치가들의 눈에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로 비치지 않았을까. 그들이 히노마루·기미가요가 국기·국가라고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국민의 통념, 사회 관습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데 있었고, 그 '사회적 정착'을 위해 학교의 의식을 비롯한 각종의 상징의례에 도입하는 데 앞장서 왔다
) 中西信太郞, 「はためく日の丸のジャパネスク」, 『世界』 1999년 6월호, 岩波書店, 103쪽.
. 서포터들의 표현대로라면 법제화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느니 만큼, 이는 히노마루·기미가요를 국기·국가로 법제화해야 한다는 정부측의 명분에 힘을 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법제화가 성취된다면 더욱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해진다.
'문화기호론'에서는 "스포츠 등의 게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간의 의미 경험은 그 장에서의 플레이가 만들어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된다
) 이시다 히데타카(石田英敬) 도쿄대학 교수가 1999년 8월 3일 참의원 「국기·국가에 관한 특별위원회」에서 행한 참고인 진술. gamp.c.u-tokyo.ac.jp/~nulptyx/against.html에서 인용(2002년 5월 27일). 이하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마찬가지.
. 그리고 "축구의 서포터가 히노마루를 바디 페인팅 하고 열광하는 일과, 학교의 국기 게양의 의식화를 통해 「국민국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같은 심벌이 개입한 것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경험"이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자는 관객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상상 속에서 기껏 「히노마루 축구 팀」의 일원이 되는 정도의 상징적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후자는 「국민국가」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습성(에토스)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국가와 국민의 역사와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양자가 뒤섞여 수준이 혼란스러울 때 스포츠와 이벤트의 「정치 이용」이 이루어지게 된다.
자민당이 국기·국가법을 추진하게 된 정치적 함의는 위의 분석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1999년의 여름, 국기·국가법은 자위대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제고시키는 '주변사태법'과 함께 국회를 통과했다. 일본은 20세기의 마지막을 그렇게 정리했다.
나오며
이제 '가벼워진' 히노마루·기미가요와 내셔널리즘의 관련성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할 때다. 일본의 논조는 대부분 내셔널리즘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없이 깃발을 휘두르고 노래를 불렀다고 본다. "90분이 끝나고 나면 지금까지 히노마루를 흔들고 있던 사람도 지극히 보통의 국제 감각을 지닌 건전한 시민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라는 '90분의 내셔널리즘'론도 있다
) www.yung-web.com/essey/national.html에서 인용(2002년 5월 24일).
. 또 내셔널리즘의 완충제(ガス拔き)론도 있어, "스포츠인 한에는 해가 없으며, 거기서 놀고 있는 편이 내셔널리즘의 완충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한다
) www2s.biglobe.ne.jp/~mmr/glocal/98/0101_zazankai.htm에서 인용(2002년 5월 27일).
.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고 하면서, 축구와 나카타가 예로 등장하기도 한다.
축구 일본 대표를 응원하는 젊은 사람들이 큰소리로 기미가요를 부르고 히노마루를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진보파를 가끔 보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국립 경기장 안에 한정된 얘기이다. 과거 나카타 히데토시 선수가 대표전을 앞두고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민족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협박을 받고 있다는 말이 퍼졌을 때, 그들 대부분은 나카타 선수의 내면의 자유를 옹호하는 정도의 기량을 지니고 있다. 걱정할 일은 아니다.
) 安部誠, 「解雇願望を捨て去って勞 運動の明るい兆候をつかもう」, ユニオン·ニュス「ファイティングポズ」62호(2001년 2월 1일). www.ops.dti.ne.jp/~grapevin/union/union0006.html에서 인용(2002년 5월 29일).
하지만 국기·국가의 법제화 이후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혹자는 "정치적인 의미를 띄게 됨으로써 히노마루·기미가요가 소원해질지 모른다. 역으로 젊은이들이 내셔널리스틱하게 되어 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분석한다
) 앞의 기사, 『아사히 신문』 1999년 11월 26일 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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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배제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복권은 현재까지는 일본이라는 틀 내에서만 작동하는 동일화의 메커니즘으로 보인다. 훌리건과 같은 노골적인 폭력으로 비화될 조짐도 현재로서는 감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재해석한 히노마루·기미가요의 경계선과 그 내실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래서 "경기장에서 히노마루를 휘두를 정도의 귀속의식과 국가의식을 바탕으로 성립할 것 같은 국가통합과 전쟁, 일체화야말로 현재의 글로벌 국가로서는 「강한 통합」이라 할 수 있"다는 지적에 공감이 갈 수밖에 없다
) 앞의 논문, 「はためく日の丸のジャパネスク」, 106쪽.
. 서포터의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