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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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기나긴 정치적 분열 시대
2. 이민족 국가의 형성 - 4세기의 화북
3. 북위제국과 귀족제 - 5세기의 화북
4. 귀족제 국가에서 부병제 국가로―6세기의 화북
5. 서위(북주)의 성공

본문내용

고 이 같은 방책이 군대를 거느리기 위한 국가재정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서위군단은 일찍이 부족연합 형식에서 나온 자발적인 군사집단의 구조를 본떴다.
주례적 관제의 시행
_ 西魏의 6관제
'6관제'는 한위 이래의 번잡한 관제를 『주례(周禮)』에 따라 간결 소박한 형재로 바꾸려는 것(소작-노변)
우문태는 부병군단의 최고 총수인 동시에 처음에는 승상으로서, 후에는 대총재로서 모든 행정관을 통솔하는 총리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소위의 천자에 대한 신하였으며 한 명의 주국대장군으로서, 또 6관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주국, 5관들과 대등한 지위에 있었다.
이같이 수평으로 연결되는 동료관계를 포함하고 통솔과 종속이라고 하는 수직관계도 아우르게 한 데서 이 조직의 성격을 찾을 수 있다.
북주제국의 화북통일
서위조정은 우문태를 이러 실권을 장악한 그의 형의 아들 우문호에게 선양을 강요, 우문호는 우무태의 후계자 우문각에게 선양을 받게 하여 '천왕'자리에 올리고, 이에 북주왕국이 성립했다. 우문호는 우문육, 우문옹(무제)을 차례로 세웠는데 우문호는 572년 무제에게 주살될 때까지 조정을 제압하고 자신이 차지한 대총재 아래에 다른 5관을 예속시켜 권력을 집중 무제는 우문호로부터 집중화한 권력을 이어받은 후 균형이 잡힌 시점에서 북제를 병합하는 데 성공(북제는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훈귀·한인 귀족·은행의 삼파전으로 스스로 자멸 576년 북주의 무제는 그 같은 북제의 쇠약을 확인한 후 북제에 대한 진격명령을 내렸다. 후주는 완전히 붕괴된 군을 버려둔 채 재빨리 수도인 업으로 도망갔으나, 이미 어떤 대책도 강구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겨우 수십 명의 수행원만을 거느린 후주 둥은 진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북주의 군사가 밀려들자 지금까지 가장 신뢰해 온 은행이 재빠르게 항복하고 북주와 내통하여 후주 등을 포로로 넘겼다.
새로운 시대의 전개
북주의 멸망
☆ 3백 년에 가까운 중국의 대분열 시대는 바야흐로 북주의 무제가 통솔하는 새로운 부병군 단에 의하여 겨우 종결될 기미를 보이는 듯 하였으나 무제가 돌궐에 대한 정벌에 나섰다 가 병으로 죽게 되었다.
☆ 선제는 아버지의 위업를 이을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으나 선제는 일단 제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위엄으로부터 해방되어 개인적 욕 망을 마음대로 추구하고 정념이 가는 대로 즉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주색에 빠진 것은 물론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공신들을 계속 제거했다.
선제는 즉위한 다음 해 일찌감치 태자인 우문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선제는 스스로를 천원황제라고 칭하며 자신을 '천(天)'이라고 부르고, '천·고·상·대 (天·高·上·大)'라는 명칭을 자신 이외에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천원황제는 광란 끝에 그 다음 해 580년 2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 후 황후의 아버지인 양견이 조정 관료들의 초대를 받아 집정하고, 결국 적대세력을 무너뜨린 후 581년에 정 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수조(隨朝)를 창시 : 주수 혁명
분열시대의 종결
_ 양견의 수제국
·위지형 등을 타도하고 부병제를 국가형성의 기반으로 삼음.
·북주의 무제가 달성한 화북 통일사업의 뒤를 이어 주수 혁명 이후 옛 북제의 영토를 포함하는 전역의 안정과 부병군단의 정비에 노력.
·진왕조를 일거에 분쇄
북위 효문제가 사회의 상층부를 중심으로 하여 호한통합의 귀족제 사회를 만들어 내려 한 것과는 달리, 부병제는 그 같은 상층부의 귀족제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로 보다 하층의 호족과 한족을 협동하여 만들어 낸 제도이다. 화북에서의 호한융합은 사회의 보다 아래층에서부터 보다 넓은 층에 걸쳐 진행되었고, 양쪽의 힘을 효과적으로 결집한 부병제 국가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의 과제
민간의 활발한 경제활동과 높은 문화수준 등은 군국주의적 통제를 곤란하게 한다. 무인 '훈귀'와 남인계 은행 및 한인 귀족간의 대립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요컨대 북제도 진도 그러한 의미에서는 선진지역이었고, 후진지역인 관중을 기반으로 한 북주만이 강격한 군국주의체제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따라서 북주와 그 계보를 잇는 수왕조가 선진지역인 옛 북제의 영토를 병합하고 나아가 옛 남조영역을 합하여 통일제국을 유지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북주 이래의 부병군단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여러 변용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식인의 바램-『안씨가훈』
♡ 안지추(531∼591)
제일급 귀족은 아니었으나 이름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지식인.
후경의 난으로부터 시작되는 남조사회의 대변동기에 휘말려 수도 건강의 끔찍한 모습을 목격한 그는 554년 강릉함락으로 서위군에게 쫓기다 관중으로 납치 관중운 고대의 번영 한 문화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하고 삭막한 세계, 완전히 야만적인 부족연합제의 군정지배 지역 안지추는 황하를 통해 북제로 망명 북제왕조를 섬기고 점차 출세하여 조정이 통솔하는 문림관 아카테미에서 중요한 문화사업에 종사 북제가 멸망하자 북주의 무제는 문림관계 지식인들을 정중하게 관중으로 이주 안지추는 가능한 한 자기를 억제 하며 조용히 살면서 북주에서 수나라로의 변천과정을 지켜보았다. : 『안씨가훈』
지식인의 강인성
『안씨가훈』 독서술의 강조
과거로의 길
삶이란 독서와 학문에 있다는 신념을 점점 굳혀 가는 모습을 처절하게 느끼게 해 준다. 여기서는 독서를 통해 '옛 성왕의 길'을 배유고 문명의 기초와 그 전통을 지키는 것이, 즉 그체적인 삶, 직을 얻고 신분을 유지하는 것으로 그대로 직결 ; 그것은 난세에 처한 중국 지식인의 강인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난세가 끝난 후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 지식인의 모습에 대한 지표이기도 했다. 문화적 선진지역을 통합한 북주-수제국은 안지추와 같은 사고를 지닌 지식인들을 그 휘하에 편입시켜 그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끌어낼 방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생겨난 제도가 6세기 말 수문제 치세에 등장한 과거였다.(과거라는 시험제도는 응모자의 출신에 상관없이 시험을 통해 뛰어난 독서인을 선발하여 급제자에게 위정자의 직과 신분을 보증하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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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1.20
  • 저작시기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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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1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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