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미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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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반도의 전후처리방안

2. 38선 분획

3. 국가건설을 둘러싼 좌우익의 쟁투

4. 미군정의 수립

5. 조선국방경비대의 창건

6. 친일 보수세력의 결집

7. 진보적 세력의 탄압

8. 9월 총파업, 10월 항쟁

9. 신탁통치안,

10. 좌우합작

11. 한국문제의 UN이관

12. 제주도 4.3

본문내용

시리아가 기권하였으며 중화민국 엘살바도르 필리핀 인도가 찬성하여 선거실시가 결의되었다.
5.10선거는 미군의 무장력에 의존한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좌익의 반대 투쟁 속에서 치러졌다. 선거당일만 하더라도 경찰 51명을 포함하여 62명의 관리가 살해되었고 수백 곳의 관공서가 피습 당하였다. 좌파의 반대투쟁과, 중간 좌파의 선거 거부, 우파 가운데서도 김구 김규식의 단선반대 표명 속에서 치르진 5.10선거는 어떻든 외형상으로는 그럭저럭 선거가 치러져 미국의 비호를 받는 이승만 한민당 계열의 승리를 안겨 주었다. 1948년 5.10선거는 극우세력 일색의 협애한 정치제도화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였다. 김구는 분단정부의 수립을 거부하고 남북협상의 길에 나서지만 북한도 역시 이미 단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먼 길을 걸어온 후라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다. 어떻든 김구로서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갖지 못하였던 친미 극우세력과의 갈등을 보였던 것이고 분단 정권수립에 참여할 수 없다는 민족주의적 태도를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임시위원단은 선거 직후 5월 13일 효력을 유보하는 제59호 성명을 내기도 하였으나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5월 25일 "자유의사가 유효하게 표현되었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한길 한국사 16 181-186).
제주도 4.3
제주도는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강력한 곳이었다. 4.3사건의 기원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를 경찰이 공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3만명이 참가한 기념행사가 끝난 후 군중들은 통일 독립정부의 수립과 미점령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시가시위 행진을 하였다. 이 때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하였다. 제주도 노동자들은 발포한 경찰관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5월 5일 총파업에 참가하였고 1주일 후에는 관공서에도 파업이 일어나 약 4만여명이 파업에 참여하였다. 정부는 60명의 경찰관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1948년 3월 1일 5.10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린 후 경찰은 2500명의 젊은이들을 체포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한 명이 고문을 받아 숨진 채 발견되었다. 48년 4월 3일 아침 인민자위대와 여맹원 등 일부 무장한 제주도민 3천여명은 "미제는 즉시 물러가라. 매국 단선단정 절대반대, 유엔조선위원단은 철거하라. 미제의 주구들을 타도하자. 조선통일독립만세"(아라리 연구원 1988; 142-43)의 구호를 앞세우고 무장항쟁에 나섰다. 그들은 제주도내 15개 경찰지서 가운데 14개 경찰지서를 기습하고 관공서, 악질 반동 관리의 집, 테러청년단(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사무실을 방화하고 친일파 악질 지주, 테러청년단 간부, 경찰을 사살하였다. 4월 15일 남조선노동당은 남로당 제주도당부대회를 개최하고 인민자위대를 해체하는 한편 각 면에서 30명씩 선발하여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48년 4월 5일 인민자위대의 공격에 직면하여 미군정은 각 도 경찰국에서 1개 중대씩을 차출하여 1700명으로 토벌대를 구성하고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4월 중순경 미군 로버트준장이 제주도에 파견되어 그의 지휘하에 대규모 증원부대를 미군상륙함정으로 수송배치하였으며 미군방첩대의 도움을 받아가며 토벌전을 전개하였다.
미군정은 5월 10일 제주도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에서의 제헌의원 선거는 게릴라세력들이 제주 전역의 선거사무소와 투표소를 습격하고 선거기록부를 탈취함으로써 치르질 수 없었다. 유격대는 남로당과 인민위원회의 지도아래 훌륭한 조직력을 가지고 싸웠다.
그러나 1948년 9월부터 1949년 5월까지 미군정은 유격대만이 아니라 유격대에 동조적인 제주도민까지 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략 3천명에서 4천명 정도로 추산되는 게릴라들에 비해 사망자가 3만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사망자의 수에 대해서는 김봉현 김민주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오사카: 문우사, 1963. p149에서는 7만명을, 그리고 김남식, {남로당연구} 돌베개, 1984. p.378에서는 8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3만명은 브루스 커밍스와 존 할리데이의 공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p.40에서는 3만여명을 주장한다. 3만명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제주인구의 12%였다.)는 것은 싸움의 성격이 유격대와의 전투가 아니라 제주도민의 대량학살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군정은 미군전술부대, 국방경비대, 국립경찰, 반동극우청년단(특히 서북청년단)을 이용하여 제주도민을 살육하였다. 5-6백명의 주민을 학교운동장에 모아 놓고 무차별 학살한 북촌리 대학살 사건은 대표적 예이며 토벌대의 학살이 집중된 제주시 동부 8리의 경우는 젊은이 중 생존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군경사망자는 118명, 서북청년단 사망자는 40명이었다. 1949년 5월 10일 제헌의원 선거가 치러졌으며 5월 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었다.
여순반란사건
48년 10월 19일 국군 14연대의 병사들이 제주도의 게릴라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띠고 LST에 승선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20일 새벽에는 약 2000명 가량의 반란군들이 여수를 장악하였으며 일부는 순천으로 가서 정오 경에는 순천을 장악하였다. 반란군들은 인근의 광양 곡성 구례 고흥 등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인민위원회를 복구하였으며 공무원 지주 우익분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경찰관을 재판하고 처형하기 위한 인민재판소를 설치하였다.
반란군의 테러로 수백 명의 경찰, 공무원, 지주가 죽음을 당하였다. 1주일 정도 후 반란군이 패배한 뒤에는 진압군의 끔직한 보복이 뒤따랐다. 공산폭동에 조금이라도 협력한 것으로 의심이 들면 쏴버렸다고 미군의 정보보고가 있을 지경이었다. 여순반란사건의 사상자 공식추계에 의하면 정부군 사망자 141명, 반란군 사망자 821명, 반란군 포로 2,860명, 실종 263명, 민간인 사망자 1천여명, 게릴라 잔여 병력 1천여명이었다.(브루스 커밍스, 존 할리데이 41-43). 이들 잔여 게릴라 병력은 48년 11월이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미 산중에 있던 게릴가들과 합류하여 본격적인 게릴라 투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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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1.21
  • 저작시기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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