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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차례>
1. 실학사상의 성립
1) 실학 개념의 정립 (1) 실학사상의 존재 (2) 실학사상의 특성
2) 실학사상의 형성배경 (1) 내재적 배경 (2) 외래적 요인
3) 실학의 연구방법과 분야
2. 실학사상의 전개
1) 실학적 왕도정치론
2) 정치개혁론 (1)권력구조 개편론 (2)관료제도 개혁론 (3)과거제도 개혁론 (4)군제개혁론
3) 대외인식과 역사관의 변화 (1)대외인식의 변화 (2)역사관의 발전
4) 경제·사회사상의 특성 (1)토지개혁론 (2)상공업진흥론 (3)사회개혁론
3. 실학의 연구과정과 성격
1) 연구의 전개과정에 대한 검토 (1)실학연구의 전개 (2)실학개념의 모색
2) 학파의 유형화 작업에 대한 검토
3) 역사적 의미와 연구의 전망
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1. 상품경제의 발달
Ⅱ. 사회구조의 변화
1. 인구의 증가
2. 양반·농민층의 분화
3. 노비제도의 붕괴
Ⅲ. 정치문화의 변이
1. 실학사상의 시대적 배경
2. 실학의 개념
3. 실학의 내용 및 발전
4. 서구문화의 전래
- 特權的 獨占商業權의 成立
1. 실학사상의 성립
1) 실학 개념의 정립 (1) 실학사상의 존재 (2) 실학사상의 특성
2) 실학사상의 형성배경 (1) 내재적 배경 (2) 외래적 요인
3) 실학의 연구방법과 분야
2. 실학사상의 전개
1) 실학적 왕도정치론
2) 정치개혁론 (1)권력구조 개편론 (2)관료제도 개혁론 (3)과거제도 개혁론 (4)군제개혁론
3) 대외인식과 역사관의 변화 (1)대외인식의 변화 (2)역사관의 발전
4) 경제·사회사상의 특성 (1)토지개혁론 (2)상공업진흥론 (3)사회개혁론
3. 실학의 연구과정과 성격
1) 연구의 전개과정에 대한 검토 (1)실학연구의 전개 (2)실학개념의 모색
2) 학파의 유형화 작업에 대한 검토
3) 역사적 의미와 연구의 전망
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1. 상품경제의 발달
Ⅱ. 사회구조의 변화
1. 인구의 증가
2. 양반·농민층의 분화
3. 노비제도의 붕괴
Ⅲ. 정치문화의 변이
1. 실학사상의 시대적 배경
2. 실학의 개념
3. 실학의 내용 및 발전
4. 서구문화의 전래
- 特權的 獨占商業權의 成立
본문내용
장의 발달을 촉진하였으며 전란중에 전공과 납속등으로 광범위하게 발급되어진 空名帖은 신분해방 또는 변동의 돌파구가 되었다.
2. 兩班·農民層의 變化
- 兩班層의 分化
조선조 후기사회를 접어들면서 양반층의 몰락현상이 두르러지게 나타나고, 또 농민신분이 합법 또는 비합법적 방법으로 양반신분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새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 예로서 軍功論賞制
) 군공자에게 고신첩과 면천면역첩을 주어 양인 이하의 계층이 양반 신분을 얻게 해주었으며, 가설직을 주어 양반대우를 해준는 것을 의미한다.
가 기존질서에 미친 영향을 들수 있다. 軍功論賞은 壬辰倭亂이 계기가 되어 그 후 내우외환이 있을때면 수시로 시행되어 하층신분을 탈피할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속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행각
) 군공을 빙자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면천·면역의 특혜를 누리며, 허위로 군공을 보고하며, 매관매직, 등의 행위로 표현될수 있다.
은 정치가 문란해지고, 사회통제가 이완되어 비생산자·면세자인 양반이 많아지고 생산자인 일반농민의 감소로 인해 社會 階層分化가 가속화 되었다.
- 農民層의 分化
壬辰倭亂이 계기가 되어 農民層에도 차츰 신분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軍功論賞에 의하여 면역, 면천 및 품직까지 주게 된 것은 획기적 신분변화 였으나 軍功을 세우기가 용이하지 않았으며 기회 또한 많치 않았다. 그러나 임진란중 조정에서 실시한 納粟政策
) 임란중에 양향조달을 목적으로 마련되 임시변통책이다. 선조 26년(1593)에 호조에서 발표된 납속군목에 의하면 향리는 3석을 바치면 3년간 면역의 혜택을 주고, 15석을 바치면 종신면역시켜주며, 30석을 바치면 참하현직을 주고, 40석을 바치면 면역혜택과 참하현직을 주고, 100석을 바치면 동반 6품에 허하는등 납속하는 실적에 따란 관직 또는 위계에 차등을 매기고 있다.
은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방법으로 하층신분에서 상승할수 있는 문호의 폭을 넙혔다.
이러한 국가 정책은 국가재정의 빈곤을 타개하여 왔으며, 그것은 신분의 합법적 변동을 가져다 주었다.
3. 奴婢制度의 崩壞
양인이 부담해 왔던 군역이 딸리게 되어 壬辰倭亂을 계기로 賤隸에게도 군에 복무할 특전과 무과에 응시할수 있는 제도가 탄생되었으며, 임란이후 노비등의 하천계층이 공납을 통해 자기의 소유물을 바치고 면천하는 것이 점차 관례화되었으며, 國軍을 위해 희생된 경우 부모, 형제 또는 친척까지 면천의 길이 트였으며, 노비종양이 보편화되어 후기에 내려올수록 노비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노비의 도망자가 속출하는 현상마저 보였다.
Ⅲ. 정치문화의 변이
1. 朝鮮朝 後期의 새로운 學風으로서의 實學形成의 時代的 背景
後期兩班社會의 붕괴과정을 정치구조 및 정치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爲民政治와 王道政治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정치문화의 변질 타락을 들수 있다.
이러한 변질적 타락은 조선왕조를 확립시켰던 전통적 정치철학인 유교적 이념이나 규범이 더 이상 지도이념으로써의 기능을 발휘할수 없게 되었다.,
2. 實學의 槪念
實學槪念은 본래 무실을 중심으로 하였던 것으로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서 본래적 유학에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견지에서 소위 經世致用
) 경세치용을 중심으로 하는 실학의 개념이 조선조 무실행수를 강조하던 주자학에 그대로의 복귀가 결코 아니었다는데 그 이론상의 인정할수 있다.
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조 후기 사회에 깊이 연관된 사회변동변수의 기능적 산물이었으며, 당시 사회 문제의 해결이라는 절박한 현실성을 전제로 하는데 실학이 가지는 복고적 성격은 당신의 시대적·사회적 환경을 전제로 한 현실성과 발전성에 직결되는 것이며 이러한 사회성은 실학의 범위를 經學 그 자체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정책, 제도, 자연과학, 농학 및 경제학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시킬수 있다. 따라서 실학은 본래적 경학에의 복귀라는 제한적 성격을 지니나 그것은 새로운 사회상황의 적응이라는 창조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이것은 正心修德이라는 소극성에서부터 世務·日用 이라는 적극성
) 적극성은 실학의 범위를 일상일용 대상으로 확대시켰고 또 실학의 방법론을 실증적 고증적으로 발전시킨 것을 말한다.
으로 발전시겼다. 결론적으로 조선조 후기사회를 새로운 역사단계로 추진시키기 위한 정치사회의식이었고 역사의식의 재창조과정으로 요약될수 있다.
3. 實學의 內容 및 發展
實學이 변전하는 조선조 사회에서 나타난 기능적인 학풍이었기에 그것의 대두는 곧 사회적인 상황의 변천과 밀접한 함수관계를 지니고 있다. 즉 그러한 학풍은 당시의 전통적인 사회 대한 경험적인 회의와 실증적인 비판정신을 토대로 하여 당시의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현실적 필요성에 의하여 촉구되어 대두한 것으로서 그러한 현실문제해결을 위한 깊은 관심은 16세기말 또는 17세기 초반부터 사회각층에서 다양하게 싹트고 있었다.
이러한 학풍의 기운은 17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체계적인 이론정리를 거쳐 본격적인 사회 개편론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실학은 한민족이 봉건적 전제질서에서 근대적 사회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의식적 노력의 산물이었고, 그러한 노력이 원만히 결실하지 못하였을 때 한국의 근대화도 그만큼 지연되었던 것이다.
4. 西歐文化의 傳來
조선은 16세기 전반부터 점차 "유럽"과의 접촉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유럽의 근대과학이 청을 통하여 소개되어 근대적인 천문, 역학, 수학, 지리학, 의학 등이 보급되었으며 천주교의 교리도 수입되었다. 서구 유학자들간에는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인 주자학을 탈피하여 학문을 추구 하려는 동향도 엿보였으며 西學은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에로 진전되었다. 그리하여 남인계양반지식층 및 일반민중의 천주교신앙은 결국 그들의 현실적인 불우에 대한 일종의 자기 항변에 지나지 않았지만, 왕조건국이래의 국시로 되어온 유학에 대한 배덕적 존재가 되었음은 물론하고 저 처럼 고수되던 쇄국의 기본정책에도 큰 파문이 되었다. 유학자들은 유학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천주교를 금압하기 위하여 북경으로부터 수입되는 문물을 일체 봉쇄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은 실로 陰陽五行說에 토대를 둔 전통적 문화에 근본적인 동요를 가져왔을뿐더러 왕조의 붕괴를 촉진하였다.
2. 兩班·農民層의 變化
- 兩班層의 分化
조선조 후기사회를 접어들면서 양반층의 몰락현상이 두르러지게 나타나고, 또 농민신분이 합법 또는 비합법적 방법으로 양반신분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새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 예로서 軍功論賞制
) 군공자에게 고신첩과 면천면역첩을 주어 양인 이하의 계층이 양반 신분을 얻게 해주었으며, 가설직을 주어 양반대우를 해준는 것을 의미한다.
가 기존질서에 미친 영향을 들수 있다. 軍功論賞은 壬辰倭亂이 계기가 되어 그 후 내우외환이 있을때면 수시로 시행되어 하층신분을 탈피할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속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행각
) 군공을 빙자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면천·면역의 특혜를 누리며, 허위로 군공을 보고하며, 매관매직, 등의 행위로 표현될수 있다.
은 정치가 문란해지고, 사회통제가 이완되어 비생산자·면세자인 양반이 많아지고 생산자인 일반농민의 감소로 인해 社會 階層分化가 가속화 되었다.
- 農民層의 分化
壬辰倭亂이 계기가 되어 農民層에도 차츰 신분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軍功論賞에 의하여 면역, 면천 및 품직까지 주게 된 것은 획기적 신분변화 였으나 軍功을 세우기가 용이하지 않았으며 기회 또한 많치 않았다. 그러나 임진란중 조정에서 실시한 納粟政策
) 임란중에 양향조달을 목적으로 마련되 임시변통책이다. 선조 26년(1593)에 호조에서 발표된 납속군목에 의하면 향리는 3석을 바치면 3년간 면역의 혜택을 주고, 15석을 바치면 종신면역시켜주며, 30석을 바치면 참하현직을 주고, 40석을 바치면 면역혜택과 참하현직을 주고, 100석을 바치면 동반 6품에 허하는등 납속하는 실적에 따란 관직 또는 위계에 차등을 매기고 있다.
은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방법으로 하층신분에서 상승할수 있는 문호의 폭을 넙혔다.
이러한 국가 정책은 국가재정의 빈곤을 타개하여 왔으며, 그것은 신분의 합법적 변동을 가져다 주었다.
3. 奴婢制度의 崩壞
양인이 부담해 왔던 군역이 딸리게 되어 壬辰倭亂을 계기로 賤隸에게도 군에 복무할 특전과 무과에 응시할수 있는 제도가 탄생되었으며, 임란이후 노비등의 하천계층이 공납을 통해 자기의 소유물을 바치고 면천하는 것이 점차 관례화되었으며, 國軍을 위해 희생된 경우 부모, 형제 또는 친척까지 면천의 길이 트였으며, 노비종양이 보편화되어 후기에 내려올수록 노비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노비의 도망자가 속출하는 현상마저 보였다.
Ⅲ. 정치문화의 변이
1. 朝鮮朝 後期의 새로운 學風으로서의 實學形成의 時代的 背景
後期兩班社會의 붕괴과정을 정치구조 및 정치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爲民政治와 王道政治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정치문화의 변질 타락을 들수 있다.
이러한 변질적 타락은 조선왕조를 확립시켰던 전통적 정치철학인 유교적 이념이나 규범이 더 이상 지도이념으로써의 기능을 발휘할수 없게 되었다.,
2. 實學의 槪念
實學槪念은 본래 무실을 중심으로 하였던 것으로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서 본래적 유학에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견지에서 소위 經世致用
) 경세치용을 중심으로 하는 실학의 개념이 조선조 무실행수를 강조하던 주자학에 그대로의 복귀가 결코 아니었다는데 그 이론상의 인정할수 있다.
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조 후기 사회에 깊이 연관된 사회변동변수의 기능적 산물이었으며, 당시 사회 문제의 해결이라는 절박한 현실성을 전제로 하는데 실학이 가지는 복고적 성격은 당신의 시대적·사회적 환경을 전제로 한 현실성과 발전성에 직결되는 것이며 이러한 사회성은 실학의 범위를 經學 그 자체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정책, 제도, 자연과학, 농학 및 경제학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시킬수 있다. 따라서 실학은 본래적 경학에의 복귀라는 제한적 성격을 지니나 그것은 새로운 사회상황의 적응이라는 창조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이것은 正心修德이라는 소극성에서부터 世務·日用 이라는 적극성
) 적극성은 실학의 범위를 일상일용 대상으로 확대시켰고 또 실학의 방법론을 실증적 고증적으로 발전시킨 것을 말한다.
으로 발전시겼다. 결론적으로 조선조 후기사회를 새로운 역사단계로 추진시키기 위한 정치사회의식이었고 역사의식의 재창조과정으로 요약될수 있다.
3. 實學의 內容 및 發展
實學이 변전하는 조선조 사회에서 나타난 기능적인 학풍이었기에 그것의 대두는 곧 사회적인 상황의 변천과 밀접한 함수관계를 지니고 있다. 즉 그러한 학풍은 당시의 전통적인 사회 대한 경험적인 회의와 실증적인 비판정신을 토대로 하여 당시의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현실적 필요성에 의하여 촉구되어 대두한 것으로서 그러한 현실문제해결을 위한 깊은 관심은 16세기말 또는 17세기 초반부터 사회각층에서 다양하게 싹트고 있었다.
이러한 학풍의 기운은 17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체계적인 이론정리를 거쳐 본격적인 사회 개편론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실학은 한민족이 봉건적 전제질서에서 근대적 사회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의식적 노력의 산물이었고, 그러한 노력이 원만히 결실하지 못하였을 때 한국의 근대화도 그만큼 지연되었던 것이다.
4. 西歐文化의 傳來
조선은 16세기 전반부터 점차 "유럽"과의 접촉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유럽의 근대과학이 청을 통하여 소개되어 근대적인 천문, 역학, 수학, 지리학, 의학 등이 보급되었으며 천주교의 교리도 수입되었다. 서구 유학자들간에는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인 주자학을 탈피하여 학문을 추구 하려는 동향도 엿보였으며 西學은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에로 진전되었다. 그리하여 남인계양반지식층 및 일반민중의 천주교신앙은 결국 그들의 현실적인 불우에 대한 일종의 자기 항변에 지나지 않았지만, 왕조건국이래의 국시로 되어온 유학에 대한 배덕적 존재가 되었음은 물론하고 저 처럼 고수되던 쇄국의 기본정책에도 큰 파문이 되었다. 유학자들은 유학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천주교를 금압하기 위하여 북경으로부터 수입되는 문물을 일체 봉쇄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은 실로 陰陽五行說에 토대를 둔 전통적 문화에 근본적인 동요를 가져왔을뿐더러 왕조의 붕괴를 촉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