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의 겸애사상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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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묵자의 겸애사상에 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들어가는 말

II. 묵자의 생애와 사회적 배경
1. 묵자의 생애
2. 묵가의 사회적 배경

III. 墨子의 兼愛思想
1. 겸애사상의 목적
2. 겸애사상의 근거
3. 겸애사상과 非功論

IV. 나오는 말 - 묵자 겸애사상의 후래적 영향

참고문헌

본문내용

가 소멸되고 또 발흥했다가 다시 쇠퇴하여 비록 따르는 무리가 구름같고 弟子가 天下에 가득하다 할 만큼 組織的이고 宗敎的인 學術團體였으나 단지 200여년에 불과한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정국의 變化와 秦漢의 통일로 말미암아 漢初에는 이미 완전히 쇠멸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유가가 정통임에 대하여 이단의 이상이었다. 가족제의 사회에 있어서 겸애사상은 「無父」로서 가족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에 부적합한 사상이었다. 또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서는 타인보다 자신의 가족 친근자를 더 사랑함은 당연하다. 묵가는 타인을 자기의 가족같이 사랑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利를 가져온다 하여도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으로는 그것에 동조하는 것은 또 어려웠다.
둘째, 묵가의 節儉主義(節用, 節葬, 非樂)은 다중의 입장에서 말한 節儉이기 때문에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반하는 것이었다. 특히 바판의 대상을 왕·제후·귀족의 사치에 두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節葬을 생각해 보아도 극단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무시함이 보여지고 있다.
셋째, 그들의 守禦集團的인 성격은 천하가 평정된 평화의 시대에는 존재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점이다.
묵가의 겸애는 단지 治亂의 문제에만 착안하여 제시된 것이어서 도덕적인 의미는 약하다. 그는 亂의 원인을 「不相愛」에 두고 亂을 平治하기 위하여는 「兼愛」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인간이 충돌이 일어나는 객관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는 毘意가 부족하다. 여기에 천의 權威가 필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묵자는 우주의 주재신으로서의 천을 종교적 열의로 신앙하였다. 천은 일체의 만물을 무차별 평등하게 傳受하는 까닭에 사람도 天志에 順應하여 개인이나 국가의 차별에 구애됨이 없이 無差別 平等에 겸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묵자의 겸애는 實踐尊卑의 차별이 심하였던 당시에 있어서 신분의 차별없이 서로 사랑할 것을 주장한 평등의 요구였으며 자신들의 삶을 해치는 지배계층에 대하여 권리와 이익 보장을 내세운 데에 주안점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의 겸애교리는 그들 집단내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애정 즉 육친간의 애정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인간 일반에게 적용함에는 實?性이 부족하게 된다. 그것이 겸애의 비현실성이다. 겸애의 實?性을 확보하기 위하여 묵자는 賞罰에 의한 강제와 천의 意志下에서 그 자율성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겸애가 신분의 차별을 지양, 서민의 해방을 지향하여 당시의 귀족계층에 서민으로서의 권리와 이익 보장을 요구하고 평등과 박애를 이상으로 한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묵자는 篤行과 실천을 중요시 하였다. 일찍이 그는 말하기를 군자에게 비록 학문이 높다 하더라도 실천하는 행위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묵자는 행동과 실천을 주장하였으니 행동은 곧 완성하기 위한 노력이며 실천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묵자는 앉으면 말하고 일어서면 행동하는 자로서 公益과 無我를 실천하는 하나의 義士라고 할 수 있다.
그의 忍耐性 있는 노력과 자신을 버리고 대중을 위한다는 정신에 대하여는 매우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며 인간과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묵자의 포부와 의지는 사실 현대 중국사회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또한 그의 사상의 실현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에서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자 겸애사상에 대하여 고찰해 왔다. 묵가의 겸애사상은 인민성을 띤 사회정치 주장과 공리성을 띤 윤리도덕관념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제자백가의 하나로 한이후 국학의 위치를 점한 유가의 사상이 주로 상류계층의 일원들에 의한 경세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면 이는 민중을 중심한 공리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묵가의 사상은 유가사상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즉 민중과 관련되어 있고, 상류사회를 중심한 治世의 道를 비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모순된 사회문제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며, "兼으로써 別을 바꾸라"고 주장한 바와같이 겸애로써 유가의 차별애를 넘어서자는 것이다. "천하에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 진흥시키고 천하에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겸애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기 ?문에 그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천하의 혼란을 평정하는데에 있었다. 그래서, 묵자가 겸애를 주장한 것도 治亂問題에서 착안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묵자는 兼을 利로 보았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각박한 백성들의 생활을 바로 반영한다는 말로 대치될 수 있다. 묵자는 어디까지나 서민계급의 이익을 도모했기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사랑이란 실리와 깊이 관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묵자는 戰爭과 攻伐은 義에 옳지 않고, 利에도 소득이 없어 천하의 커다란 해로움이라 생각하였다. 군자는 천하를 위해 이익을 일으키고 손해를 제거하여야 하므로, '공격을 비난'(非攻)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비공론이라고 한다.
유가사상이 국학이 된 후에도 묵가사상은 제자백가의 하나로 계승되었다. 유가사상의 흥왕에 의해 점차 쇠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의 사상으로서 항상 그 명성을 견지하고 있었다. 특히 시대사회가 바뀔 때는 이들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일어나므로 그 사회문제를 시점으로 하는 입장이나 시각은 그 무게를 전승시켰다고 할 수 있다.
參 考 文 獻
<원전류>
『墨子』
<단행본류>
가노나오키, 『중국철학사』, 을서문화사, 1989
金學主, 『墨子』, 民音社 ,1988
勞思光, 『中國哲學史』 , 探求堂, 1989
李民樹, 『제자백가』, 홍신문화사, 1986
이종계, 『중국문화개론』, 東文選, 1993
풍우란, 『중국철학사』, 형설출판사, 1989
풍우란, 『중국철학사』, 한울출판사, 1989
풍우란, 『중국철학소사』, 이문출판사, 1995
<논문류>
손군옥, 「墨子의 兼愛思想에 관한 고찰」, (대구카톨릭대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李相欣, 「先秦儒家·墨家思想의 比較硏究」, (충북대학교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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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1.30
  • 저작시기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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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13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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