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학 사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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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실학 사대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참고 문헌>

본문내용

州). 자 낙서(洛瑞), 호 척재(三齋) ·강산(薑山). 177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 ·지평을 거쳐 승지 ·대사간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그는 다른 세 사람과 처지가 달랐다. 당당한 가문에서 영의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서얼이 아니다. 20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니 누구나 부러워할 일이고, 한때 천주교를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순조롭게 진출해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정조 때에서 순조 때로 넘어가면서 정권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어도 타격을 입지 않고 도리어 승진을 했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박지원을 따르고 후사가의 다른 세 사람과 어울렸던가는 의문이 아닐 수 없기에, 사적인 취향과 공적인 위치를 갈라서 볼 필요가 있다.
박지원이 이서구의 문집 서문으로 써준<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에 의하면, 이서구는 16세 때 박지원을 만나서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문장 수련을 위한 스승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장만이 아닌 사람을 알고 깊은 공감을 나누게 되었다. 박지원은 그 글에서 이서구의 시문이 옛사람을 본뜨지 않은 점을 기리고, 그 때문에 비난받으며 미처 익히지 못한 탓이라고 둘러대라고 했다. 이서구는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에서, 어느날 찾아가보니 박지원은 밥을 먹지 못한 지 사흘이나 되면서도 맨발 맨머리로 행랑아범들과 말을 주고받고 있더라고 했다. 이서구는 자기 처지는 다르더라도 그런 인간관계를 본받고, 시정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일을 맡은 기획에 박지원 학파로서의 포부를 펴려고 한 것은 아니다. 사생활과 관직의 소임을 구별했기에 지위가 계속 높아질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러자니 이서구의 문학은 투철한 의식을 갖기 어려웠다. 박지원이 추켜올린 말은 사실이라기보다 희망사항이다. 귀양갔을 때의 시는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말하는 한편 "羞作市門客 强學邯鄲步"(시정인 노릇을 하며 남의 흉내를 내려고 한 것이 부끄러워라)하고 하는 술회까지 지녀서 내심을 깊이 드러내보였으나. 솜씨가 상당하다고 해서 알려진 시는 대부분 관조하는 자세로 주위의 사물을 관찰하며 고요함을 얻고자 한 것들이다. 이서구가 가장 후배인 것을 보면, 후사가의 시풍이 계속 뻗어나갈 수 없었던 한계를 알아차릴 수 있다.
<참고 문헌>
한국문학통사, 조동일, 지식산업사, 1998
한국한문학사, 차용주, 경인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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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2.12.24
  • 저작시기200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6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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