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아시아에의 문명론과 국민국가:20세기 전반기의 담론 구조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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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文明이란 어휘의 수용과 변용
3. 중국의 동서문화논쟁의 구조
4. 일제하 한국의 동서문명론의 구도
5. 결론을 대신하여

*한자 소량포함
(한자로 된 한단어 젤 마지막에 커서를 놓고
키보드의 한자키를 누루면 한글로 바뀌는거 다들 아시죠??)

본문내용

.5)
그는 동양문화라고 하는 것은 "있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실상은 그 자신으로서 우리 동양인의 생활 속에 살고 있는 구체적 힘으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追後하여 추출한 것"이라고 보았다. 필자식으로 풀이한다면 동양문화란 본질적인 것,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누가 왜 그것을 필요로 했는가가 중요해진다. 이에 대해 그는 서양문화가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동양은 문화적으로 통일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당위의 문제"라고 말한다. "동양은 문화공동체로서의 운명을 역사적으로 負荷되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것이 현실적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고 나서는 동양문화의 성격을 '합일성 .직접성 .직관성'으로 꼽고 그것은 '아시아적 정체성' 곧 '아시아적 정체농업'에서 연유했는데 정체성이라 해도 "결코 결점이 아니라 도리어 장점"이 된다고 (구체적 논증 없이) 마무리짓고 말았다.
그의 글에서 동양문화가 왜 '역사적으로 負荷'되었는지, 또 그렇게 한 주체가 누구인지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 까닭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조선의 내재적 요구, 일상생활상의 요구에 따라 제기된 것이 아니라, 세계체제의 위계질서 속에서 정점에 있는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일본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이념 창출로써 동양문화가 다시 중시되었던 것이다. 동서문명의 융합의 결과로 형성될 새로운 문명을 아시아에서 확립하는 일, 곧 아시아주의를 실현시킬 자격은 일본에 있었지 식민지 조선에 있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일본의 이념적 磁場 속에 처하면서도 동양문명론을 달리 본 경우는 없었을까 궁금해진다. 여기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세계사적인 전환기를 맞아 세계문명 속의 아시아의 위치에 대해 성찰한 두 문학자가 두드러지는데 林和와 金起林이다.
1938년 노벨 문학상이 『大地(The good Earth)』를 쓴 펄 벅(Pearl S. Buck)에게 돌아가자 그에 대한 평론을 발표한 맑스주의 평론가 林和(1908-1953)는 그녀가 수상한 이유를 소설 가운데 묘사된 현실의 세계성 곧 '지역의 역사의 전형성'에서 찾았다. 당시 중국에는 동양인만이 아니라 서구인의 운명의 중요한 一端이 연결되어 있고, 세계사의 운명의 결정적인 매듭의 한 알맹이가 풀리고 얽히는 분기 과정이 진행중이었다고 본 임화는 바로 그것을 펄 벅이 리얼리즘의 전통에서 형상화해 세계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세계사가 전개되는 무대로 중국을---일본이 아니다!---주시한 그의 안목이 날카롭다.
동양문화를 신비화시키는 짓을 '근대인의 일종의 자포자기' 또는 '근대문명의 말기 현상'으로 파악한 것은 평론가 金起林(1908-?)이었다. 근대문화가 모순 상극의 절정에 직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양문화의 파탄을 말한다면 '문화적 감상주의'이고 그 대안으로 동양주의나 동양문화에 귀의한다면 '경솔한 사색'이라고 비판한 그가 대신에 내세운 길은 "이질 문화와의 전면적인 접촉.종합"이었다. 이렇게 문화의 발전방향을 잡을 때 '진정한 東洋의 居處'가 발견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동양을 "과학적으로 새 발견"해야 하는데, 동양 발견의 구체적 자료로 제시한 것은 '시대.민족의 形成力'이 깃들인 '문학 또는 예술의 深室'이었다.
물론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던 임화와 김기림 모두 동양문명론의 주체의 문제를 더 이상 본격적으로 거론하지는 못하였다. 따지고보면 동서문명론은 애초부터 지극히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동서문명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물음은 바로 동아시아 각국의 취해야 할 개혁 노선이 어떠해야 하며 그것을 추진할 자격을 누가 갖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 직결된 것이었다. 서양 근대의 비결이고 따라서 문명개화의 주체로 인식된 국민국가를 상실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문명의 융합을 현실감있게 논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여건에서도 중국의 역할을 중시한 林이나 '민족의 형성력'에 주목한 金처럼 民族 단위의 발상을 제출함으로써 피압박민족의 자기발견.자기표현의 길을 모색하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패권주의를 견제하여 多重的 주체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의의는 일정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5. 결론을 대신하여
20세기 전반의 동아시아에서 문명론이 한.중.일의 국민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음은 이미 앞의 서술에서 확인한대로이다. 사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국민국가 형성이란 근대에 적응하는 길이며 그렇지 못할 때 망국.망종의 위기에 처할 만큼 절실한 보편적 과제도 없다 하겠다. 따라서 국민국가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문명의 보편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조선의 문명론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식민지 억압 상태를 무시하고 (자주적) 국민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지역공동체, 다시 말해 '신문명'을 지향한다는 것은 해당 지역 주민의 보편적 욕구를 저버리고 다른 국민국가 이익을 좇는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섣불리 탈국민국가적인 운동이나 志向을 문명의 이름에 값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평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국민국가를 추구하는 데 그치는 것은 근대에 적응하다 그에 매몰되고말아 더 이상 문명의 보편성을 확충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20세기에 국민국가를 추구하던 나머지 식민지지배와 전쟁이라는 (문명에 반하는) 야만의 상태가 잦았던 것은 그 적나라한 증거이다. 여기서 문명이란 기호에서 그 의미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전통적 의미---인간사회의 광명과 번영---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시도했던 동서문명융합의 노력이 말해주듯이 근대라는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틀 안에서 새로운 문명을 추구한다는 것은 개별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 확보에는 기여하지만 문명으로서의 힘은 잃고 만다는 사실이다.
20세기를 지나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문명이 형성된다면 그것은 근대를 극복하려는 변혁운동의 현장으로서의 동아시아가 좀더 인간다운 역사적 체제의 창조에 기여를 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할 것이다. 이 과제는, 보편을 지향하는 문명의 잠재력을 일상생활에 구체화시켜 생활방식을 변화시킬 사회세력의 존재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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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3.01.02
  • 저작시기2003.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7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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