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이스라엘의 6일전쟁
<1967년 6월5~10일>
<1967년 6월5~10일>
본문내용
고 그날 저녁에는 엘 아리쉬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한편 샤론 사단이 담당한 움 가다프와 아부아게일라 일대는 중앙축선상의 입구로서 이스라엘에서 시나이로 진입하는 관문일 뿐만 아니라 시나이의 동서통로를 연결하는 戰略的 요충지인 동시에 시나이 최강의 요새지대였다.
샤론은 이곳에 대하여 주간공격에서는 실패하였으나 야간에 공정부대까지 동원하여 과감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6일 새벽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기디와 미틀라 통로에 이르는 도로를 개통시켰다.
탈과 샤론이 이집트군의 강력한 요새진대를 돌파하기 위한 作戰을 전개하는 동안 요페는 그들 사이에서 砂丘(사구)를 통과하여 빠져나갔고, 이미 5일 저녁에 엘아리쉬에서 비르라판에 이르는 도로를 점령함으로써 이집트군 예비대의 주진지로의 증원을 차단하였다.
6일 이집트군 사령관 무르타지는 상황의 불리를 깨닫고 예하 모든 부대에게 운하 동쪽 약50마일 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가 그렇게 조치한데는 이스라엘 공군이 그의 진지들을 무자비하게 폭격하는데 반하여 이집트공군으로부터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군은 시나이반도에서 기대 이상으로 신속하게 전진하였나 국방상 다얀과 총참모장 라빈(현재 이스라엘 수상)은 즉각적인 전과확대보다는 일단 초전에 발생한 문제점들을 시정토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요르단 전투에 집중하였다. 이집트장군 리아드는 요르단전선 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對이집트 공중공격이 끝나자 곧 요르단군에게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요르단 포병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지역과 그 훨씬 북쪽지역에 대하여 포격을 개시하였다. 이 포격은 유엔휴전감시위원단장 오드불의 포격중지 호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으며 그러자 이스라엘군은 5일 낮에 보복을 결정하였다. 먼저 이스라엘 공군은 요르단 공군을 간단히 쓸어버리고 요르단에 도착한 이라크 여단을 무력화시켰다.
중부사령관 나르키스의 목표는 스코프스山의 고립된 유태인 지역을 점령하고 요르단江 以西의 모든 요르단軍을 소탕하고 전 웨스트 뱅크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승리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정신전력에서
치열한 戰鬪끝에 이스라엘군이 웨스트 뱅크의 북부에서 제닌市를 점령하고 남부에서 예루살렘 근교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였을 때 이미 戰爭의 결과는 명확한 것으로 비쳤다.
요르단은 敗北한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공군력 상실이었으며 그 밖에 단 하나 있던 레이더 기지도 파괴되고 戰術的인 실책과 공군력 열세로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바로 이런 때 전쟁 직전의 약속에 따라 기대되었던 시리아와 이라크軍을 비롯한 아랍 각국의 지원 상태가 형편없었다.
시리아는 항공력 상실을 이유로 지원을 거부하였고 요르단에 도착한 이라크軍마저도 마지못해 요르단江을 넘어 보다가 이스라엘 공군으로부터 단 한번의 폭격을 받고는 크게 당황한 나머지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리아드는 이집트軍 참모총장 아메르원수와의 협의 후에 전 요르단軍을 요르단江 동쪽 제방으로 철수를 결정하였다.
6월 7일 시나이 전선의 상황은 기대 이상으로 이스라엘에게 유리하였다. 새벽에 제밸 리브니에 있던 탈의 1개 기갑여단과 탈의 지휘를 받는 요페의 1개 기갑여단은 강력하게 주진지를 공격 곧 수중에 장악하고 그날 오후 비르 지프가파에 도달하였다. 북쪽에서 이스라엘군은 엘 아리쉬에 진입하고 서쪽으로의 진격에 박차를 가하고 조우한 이집트군은 도주하기에 바빴다.
기디와 미틀라 통로를 향해 돌진하던 요페의 부대는 이집트군과 뒤섞일 정도로 신속히 진격하였는데 이때의 상황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쪽 전차들이 가끔 똑같은 영국제 센추리언끼리 충돌하는 바람에 훨씬 복잡해졌다.
그러나 이집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거의 없었다. 한편 반도 최남단의 샴엘세이크에서는 이집트군 수비대가 철수함으로써 이스라엘 공정대는 무혈점령하고 수에즈만을 따라 북상하였다.
8일 치열한 戰鬪를 치른 후 드디어 이스라엘군은 운하에 도달하였다. 이집트군 차량은 운하 가까이 도로에 꽉 들어찼고 이에 대하여 이스라엘 공군은 무자비한 폭격을 가하였다. 이날 저녁 마침내 낫세르는 유엔의 휴전 요구를 수락하였다.
한편 시나이와 요르단전선 상황이 거의 승리를 굳혀 나가자 이스라엘은 북부사령관 엘리자르장군에게 골란고원을 공격, 시리아군을 격파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집트와 요르단이 이미 휴전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를 공격한 것은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國境紛爭지역으로서 戰略的 요충이며 요르단강의 수원지인 골란고원을 점령하기 위해서 였다.
사실상 다얀은 승리를 보다 확실하게 하고 또한 이스라엘인들이 당시 가장 증오하는 適 시리아라는 감정이 작용한데다가 시리아로부터의 끊임없었던 위협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골란고원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점령하는데는 꽤 서둘렀으며 본래 정한 휴전시간의 연장을 유엔휴전감시단에 요청까지 하고 골란고원을 확실히 장악하였다. 6월10일 18시 시리아는 휴전에 동의하고 6일 전쟁은 그 막을 내렸다.
6日만에 이루어진 이 戰爭의 결과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쌍방이 입은 인원 및 주요장비의 손실을 비교해 보면 이스라엘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
구분
이 스 라 엘
아 랍
이스라엘 : 아랍
인 원
전 사
689명
19,600명
1 : 28
부 상
2,563명
30,760명
1 : 12
포 로
16명
6,584명
1 : 411
장 비
항 공 기
26대
451대
1 : 17
전 차
86대
990대
1 : 12
戰爭의 결과 발생한 영토의 변화는 엄청났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웨스트 뱅크, 골란고원 등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 본토의 거의 6배에 해당하는 새로운 땅을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戰略的으로 중요한 거대한 완충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생존과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
병력규모가 우세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로운 무기로 무장된 것도 아닌 군대가 이루어낸 기적에 대하여 프랑스의 戰略家 앙드레 보프르장군은 그 비결을 적극적 공세행동과 기습, 결단과 속도, 항공력, 예하지휘관들에 부여된 고도의 자유재량권과 그들의 우수한 작전능력, 병참지원능력, 그리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精神戰力에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한편 샤론 사단이 담당한 움 가다프와 아부아게일라 일대는 중앙축선상의 입구로서 이스라엘에서 시나이로 진입하는 관문일 뿐만 아니라 시나이의 동서통로를 연결하는 戰略的 요충지인 동시에 시나이 최강의 요새지대였다.
샤론은 이곳에 대하여 주간공격에서는 실패하였으나 야간에 공정부대까지 동원하여 과감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6일 새벽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기디와 미틀라 통로에 이르는 도로를 개통시켰다.
탈과 샤론이 이집트군의 강력한 요새진대를 돌파하기 위한 作戰을 전개하는 동안 요페는 그들 사이에서 砂丘(사구)를 통과하여 빠져나갔고, 이미 5일 저녁에 엘아리쉬에서 비르라판에 이르는 도로를 점령함으로써 이집트군 예비대의 주진지로의 증원을 차단하였다.
6일 이집트군 사령관 무르타지는 상황의 불리를 깨닫고 예하 모든 부대에게 운하 동쪽 약50마일 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가 그렇게 조치한데는 이스라엘 공군이 그의 진지들을 무자비하게 폭격하는데 반하여 이집트공군으로부터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군은 시나이반도에서 기대 이상으로 신속하게 전진하였나 국방상 다얀과 총참모장 라빈(현재 이스라엘 수상)은 즉각적인 전과확대보다는 일단 초전에 발생한 문제점들을 시정토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요르단 전투에 집중하였다. 이집트장군 리아드는 요르단전선 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對이집트 공중공격이 끝나자 곧 요르단군에게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요르단 포병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지역과 그 훨씬 북쪽지역에 대하여 포격을 개시하였다. 이 포격은 유엔휴전감시위원단장 오드불의 포격중지 호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으며 그러자 이스라엘군은 5일 낮에 보복을 결정하였다. 먼저 이스라엘 공군은 요르단 공군을 간단히 쓸어버리고 요르단에 도착한 이라크 여단을 무력화시켰다.
중부사령관 나르키스의 목표는 스코프스山의 고립된 유태인 지역을 점령하고 요르단江 以西의 모든 요르단軍을 소탕하고 전 웨스트 뱅크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승리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정신전력에서
치열한 戰鬪끝에 이스라엘군이 웨스트 뱅크의 북부에서 제닌市를 점령하고 남부에서 예루살렘 근교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였을 때 이미 戰爭의 결과는 명확한 것으로 비쳤다.
요르단은 敗北한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공군력 상실이었으며 그 밖에 단 하나 있던 레이더 기지도 파괴되고 戰術的인 실책과 공군력 열세로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바로 이런 때 전쟁 직전의 약속에 따라 기대되었던 시리아와 이라크軍을 비롯한 아랍 각국의 지원 상태가 형편없었다.
시리아는 항공력 상실을 이유로 지원을 거부하였고 요르단에 도착한 이라크軍마저도 마지못해 요르단江을 넘어 보다가 이스라엘 공군으로부터 단 한번의 폭격을 받고는 크게 당황한 나머지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리아드는 이집트軍 참모총장 아메르원수와의 협의 후에 전 요르단軍을 요르단江 동쪽 제방으로 철수를 결정하였다.
6월 7일 시나이 전선의 상황은 기대 이상으로 이스라엘에게 유리하였다. 새벽에 제밸 리브니에 있던 탈의 1개 기갑여단과 탈의 지휘를 받는 요페의 1개 기갑여단은 강력하게 주진지를 공격 곧 수중에 장악하고 그날 오후 비르 지프가파에 도달하였다. 북쪽에서 이스라엘군은 엘 아리쉬에 진입하고 서쪽으로의 진격에 박차를 가하고 조우한 이집트군은 도주하기에 바빴다.
기디와 미틀라 통로를 향해 돌진하던 요페의 부대는 이집트군과 뒤섞일 정도로 신속히 진격하였는데 이때의 상황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쪽 전차들이 가끔 똑같은 영국제 센추리언끼리 충돌하는 바람에 훨씬 복잡해졌다.
그러나 이집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거의 없었다. 한편 반도 최남단의 샴엘세이크에서는 이집트군 수비대가 철수함으로써 이스라엘 공정대는 무혈점령하고 수에즈만을 따라 북상하였다.
8일 치열한 戰鬪를 치른 후 드디어 이스라엘군은 운하에 도달하였다. 이집트군 차량은 운하 가까이 도로에 꽉 들어찼고 이에 대하여 이스라엘 공군은 무자비한 폭격을 가하였다. 이날 저녁 마침내 낫세르는 유엔의 휴전 요구를 수락하였다.
한편 시나이와 요르단전선 상황이 거의 승리를 굳혀 나가자 이스라엘은 북부사령관 엘리자르장군에게 골란고원을 공격, 시리아군을 격파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집트와 요르단이 이미 휴전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를 공격한 것은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國境紛爭지역으로서 戰略的 요충이며 요르단강의 수원지인 골란고원을 점령하기 위해서 였다.
사실상 다얀은 승리를 보다 확실하게 하고 또한 이스라엘인들이 당시 가장 증오하는 適 시리아라는 감정이 작용한데다가 시리아로부터의 끊임없었던 위협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골란고원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점령하는데는 꽤 서둘렀으며 본래 정한 휴전시간의 연장을 유엔휴전감시단에 요청까지 하고 골란고원을 확실히 장악하였다. 6월10일 18시 시리아는 휴전에 동의하고 6일 전쟁은 그 막을 내렸다.
6日만에 이루어진 이 戰爭의 결과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쌍방이 입은 인원 및 주요장비의 손실을 비교해 보면 이스라엘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
구분
이 스 라 엘
아 랍
이스라엘 : 아랍
인 원
전 사
689명
19,600명
1 : 28
부 상
2,563명
30,760명
1 : 12
포 로
16명
6,584명
1 : 411
장 비
항 공 기
26대
451대
1 : 17
전 차
86대
990대
1 : 12
戰爭의 결과 발생한 영토의 변화는 엄청났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웨스트 뱅크, 골란고원 등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 본토의 거의 6배에 해당하는 새로운 땅을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戰略的으로 중요한 거대한 완충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생존과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
병력규모가 우세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로운 무기로 무장된 것도 아닌 군대가 이루어낸 기적에 대하여 프랑스의 戰略家 앙드레 보프르장군은 그 비결을 적극적 공세행동과 기습, 결단과 속도, 항공력, 예하지휘관들에 부여된 고도의 자유재량권과 그들의 우수한 작전능력, 병참지원능력, 그리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精神戰力에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