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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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다산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Ⅲ. 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론
1. 토지개혁론에 대한 인식
2. 정전론
1) 정전론의 제기와 목적
2) 정전론의 토지개혁론
3) 정전론의 문제점
3. 여전론의 문제제기와 목적
1) 여전론의 문제제기와 목적
2) 여전제 개혁의 원칙·내용·생산분배
3) 여전론의 노동력 이동과 사의 문제
4) 여전론의 전세와 병농일치
5) 여전론의 문제점

Ⅳ. 다산의 정전론과 여전론의 관계

Ⅴ.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것에 중점을 두어야만 문제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는 길이 되리라고 생각되며 양자의 성립시기문제도 자동적으로 해명되리라 본다. 또한 양자문에 공통되는 어떠한 측면(예컨대 다산사상 전반의 기저가 되는 합리적인 정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二次的인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Ⅳ. 結 論
다산 정약용은 조선봉건왕조가 붕괴과정에 있던 18세기 후반에 태어나 오랜 관료생활과 유배생활을 통해서 당시 사회의 諸矛盾을 몸소 체험한 유교주의 관료학자였으며 한국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의 거봉으로서 우리나라 사회의 경제사상 전체에 특이 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다산이 활동하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엽은 국내적으로는 정치·경제적으로 협잡과 부패가 심각하였으며 이는 당쟁과 어울려 국가와 민족의 곤궁이 극에 달하여 도처에서 민란이 이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서구의 자본주의 경제세력이 잠입되고 있었으며, 서구 정신의 본체인 기독교 사상의 이식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대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狀況에서 농촌경제는 극도로 피폐하여 농민의 생활은 곤궁이 막심함으로서 조선후기의 농업문제는 그 심각성이 날로 더해 가고 있었다. 당시 농업문제로 떠오른 중요한 문제는 권문세가와 호족들의 토지겸병과 지주소작제에 따른 토지소유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다. 다음으로 식장의 농민착취와 遊食兩班士族의 문제, 그리고 농업기술의 개량문제 등이 해결되어야 할 우선 과제였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이래 壬辰·丙子 兩亂은 왕권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흔들어 놓은 치명적 外侵이었다. 이 엄청난 外侵을 겪으면서 왕토의 젖줄인 농업은 피폐해져서 回復不能의 장기적 과제로 대두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위정자들은 이를 발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치부의 기호로 삼았으며, 말단 이서들까지 가세하여 농민은 餓死직전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에 다산은 선배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으로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음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한층 더 철저한 관점에서 출발하고자 했다. 그의 사회개혁사상의 바탕은 바로 민의 l입장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경제사상은 농을 천하의 근본으로 보는데 있으며 국부의 근본 또한 농업에 있다고 보아 농업을 강조하고 農業정책의 핵심은 토지문제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사상은 18세기 프랑스의 케네(F. Quesnay 1694∼1774)와 같은 중농주의학자가 주장한 것과 같이 「농민이 빈하면 왕족도 빈하고 나라가 빈하면 농민도 빈하다」또는 「부의 源泉은 토지에 있다」고 하여 사회의 기초는 부에 있으며 농업만이 사회존립의 물적기초가 되는 동시에 부를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부의 생산에 역할하는 농민은 봉건사회에서 보호해야 하며, 課稅는 대지주와 봉건영주만이 부담해야 한다는 중농주의 사상과 비교할 때 다산의 경제사상과도 그 정신이 상통한다고 보아지며, 특히 토지경제의 개혁이라는 면에서는 다산의 여전제가 더욱 적극적이며 발전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본다. 다산은 조선후기 모순을 토지와 농민문제에 집중되어 있다고 보아 사적 토지소유제도가 농민생활을 곤궁하게 하고 국가재정을 약화시키는 근본원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사지 국유론의 원칙에 입각하여 사적 지주제도를 排除하고 이서들의 횡포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는 국가의 기본산업인 농업이 침체상태에 빠져 국기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농촌사회의 안정과 발전없이는 국가의 안정도 기대할 수 없다는 기본인식 아래 농촌사회의 근본적인 재편성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목적에 따라 d 상된 것이 그의 경세유표에서 제시한 정전제와 시문집인 전론에서 제안한 여전론이다. 그의 여전론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패기에 차 있던 38세때 구상한 것으로 조선왕조의 물질적 기초인 토지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불식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음으로 해서 가히 혁명적인 개혁안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전론이 그의 근본적인 토지개혁론이긴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는데는 상당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할 때 그것은 급진적이고 환상적인 구상이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여전론은 점진적이고 현실적인 개혁론으로 발전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도출된 것이 그의 사상이 완숙기에 접어든 56세때 내어 놓은 정전론이었던 것이다. 즉 여전제의 사상을 정전제로 현실화하여 토지문제의 개혁을 해 나간 것이다. 그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지주제를 타파하고 나아가 정치권력을 재편하는 문제에 까지 접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다산의 토지개혁사상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여건을 고려할 때 획기적인 개혁안이었다. 특히 그의 여전제는 거의 혁명적이라 할 수 있으며, 정전제는 당시의 현실을 인정한 타협적인 개혁안이라 할 수 있으나 그 기저에 흐르는 정신은 같은 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다산의 개혁안이 비록 당시의 집권층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양개혁안의 바탕에 깔려있는 농민의 단합된 힘을 근본으로 하는 개혁의 의지는 훗날 농민운동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적지않은 影響을 미쳤을 것으로 믿는다. 또한 그의 토지개혁사상은 우리나라의 사회경제사상사적 위치에서 볼 때 큰 산맥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參 考 文 獻
姜萬吉, 《韓國近代史》, 창작과 비평사, 1980
金玉根, 《韓國土地制度史硏究》, 大旺社, 1980.
朴宗根, 《封建社會해체기의 사회경제구조》, 청아출판사, 1982.
宋贊植, 〈朝鮮後期의 農業史 연구에 대하여〉, 역사학회, 1970.
李乙浩, 《茶山經學思想硏究》, 을유문화사, 1978.
韓 劤, 《丁茶山 硏究의 現況》, 민음사, 1985.
韓 劤, 《조선후기의 사회와 문화》, 을유뮨화사, 1961.
金容燮, 〈다산과 楓石의 量田論〉, 한국사연구 제11호, 한국사학회, 1974, 9.
宋贊植, 〈朝鮮後期의 농업사 연구에 대하여〉, 역사학회, 1970.
李榮薰, 〈조선후기 토지소유의 基本構造와 農民經濟〉,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 문, 1985. 2.
姜萬吉, 《茶山의 政治經濟思想》, 창작과 비평사, 1990.
김광진, 《다산 정약용의 사회 경제사상》, 한마당,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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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3.26
  • 저작시기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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