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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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머리말

Ⅱ. 조선 초ㆍ중기의 신분제

Ⅲ. 조선 중ㆍ후반의 사회ㆍ제도적 변화
1. 양반인구의 증가
2. 서얼인구의 증가
3. 중인의 성장
4. 서민의 경제적 성장
5. 노비정책의 전환

Ⅳ.신분의 분화와 이동
1. 양반계층의 분화
2. 서얼의 신분상 변화
3. 중간신분층의 신분상승
4. 서민층의 신분상 변화
5. 노비층의 신분상 변화

Ⅴ.결론

본문내용

(3) 노비 신분층의 반항
노비 신분층은 그들의 상전이나 지배층에 항거하여 신분상승을 도모하였는데, 단순히 신공납부의 기피나 도망에 그치지 않고 상전이나 상전의 가족을 살해하는 일까지도 흔히 일어나고 있었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4권(탐구당), 1995년, p. 151.
또는 도망하여 도적의 무리에 가담하거나 반란에 가담하여 지배체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자들도 있었다.
2) 내시노비의 혁파
노비신분층의 동요는 정조대 이후에 더욱 심화되어 갔고 노비의 감축이 극심해지기에 이르렀다. 이에는 신역의 과중보다는 노비들의 자각이 촉진되어 '역중명천'한 노비라는 신분 자체를 싫어하여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려 한데 그 이유가 있었다. 노비가 급격히 감소할수록 비총법에 의해 남아있는 노비들의 고통(族徵, 隣徵, 白骨徵布, 黃口侵徵)은 계속 증가되어 갔다. 가난한 노비들이 자신의 신포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른 노비의 몫까지 부담이 지워지자 결국 이들도 유리하여 노비는 날로 감축되어 갔다. 이런 현상이 점차 확대되자 노비신공으로 재정을 이끌어가던 관서에서는 재정부족이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노비의 도망이나 사망은 날로 늘어가나 출생은 전혀 보고되지 않아 신공의 수납량이 해마다 줄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 후반에 이르러서는 노비제페지론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양역과 노비신공이 모두 1필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구태여 노비라는 명칭으로 묶어둘 필요성이 없었으며, 차라리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줌으로써 명천에서 오는 도망을 방지하고 은루노비의 출현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국가의 재정부족을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노론의 '내시노비혁파론'과 남인의 '내시노비혁파 반대론'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정조가 죽고 노론 벽파 일색으로 정부가 구성되자 순조 원년에 곧바로 내시노비를 혁파하여 이들의 신분을 양인으로 상승시켰다. 한편 내시노비를 제외한 역노비와 지방의 기관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는 공노비혁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은 신분적으로 예속되어 신공만을 납부하던 내시노비와 달리 입역으로 그들의 임무를 이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 23에 이들도 사노비와 함께 신분세습제가 폐지되어 자기 한 몸에 한하여 사역되다가, 고종 31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신분제도가 폐지되어 제도상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4권(탐구당), 1995년, p. 157.
공노비에 대한 정책은 사노비에게까지 적용되었던 까닭으로 내시노비혁파는 언젠가는 노비제 자체의 폐지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Ⅴ.결론
신분적 차이에서 오는 양반과 상민들의 차별대우는 조선 후대에 올수록 극심해졌다. 이에 역이 천하여 신분상승을 꿈꾸든, 역이 과중하여 신분상승을 꿈꾸든 간에 많은 중인, 서민, 노비들이 통청운동을 벌여 현재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소위 부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신보다 높은 신분으로 이동했으며, 양반도 너무 가난하면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전호 등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또한 대부분의 상민들은 위에서 언급한 합법적이거나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더 높은 신분을 획득했다. 그러나 조정이나 지방관아의 가혹한 수탈로 부를 축적하지 못한 적지 않은 수의 상민층은 불만세력으로 성장하여 후에 민란의 중심세력이 된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양반 중심의 사회에 신분제의 변동이 일어났다. 양반 중 계속 정권에 참여한 양반을 벌열, 정권에서 소외되어 지방에 토착하여 기반을 가진 양반을 향반(鄕班), 향반 중에서 가세가 몰락하여 쇠잔한 양반을 잔반(殘班)이라 하였다. 향반은 벌열에 비하여 지위가 떨어졌으며, 잔반은 대부분 소작농이 되었는데 잔반의 수는 점차 늘어갔다. 한편, 중인계층에도 신분상의 변화가 이루어졌고, 적서의 차별도 조금은 개선되어 규장각(奎章閣)의 요직인 검서관(檢書官)에 서얼출신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역관들은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새로운 문물에 접하여 견문도 넓히고 사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사회적 지위를 높여갔고, 의관은 그 전문적 기능으로, 서리들은 행정능력이나 문학적 소양으로 새로운 사회적 위치를 주장해 갔다. 상민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도 계층분화가 일어났다. 농민 중의 일부는 농업기술의 발달, 농업경영방법의 개선, 상업적 농업의 발전 등으로 부농이 되거나 서민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또, 납속책(納粟策)으로 공명첩(空名牒)을 사서 신분을 높여 양인이 지던 군역의 부담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노비제도도 무너졌으며 이것은 임진왜란 때 노비문서가 불타버린 데다 국가에서 군사적·재정적 이유로 신분상의 제약을 점차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노비도 속오군(束伍軍) 등 군에 편성되어 무술시험을 통하여 양인이 되기도 하고, 2대 이상 양역(良役)에 종사하였다 하여 양인신분을 얻기도 하였으며, 전란 때 군공을 세우거나 혹은 납속으로 양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마침내 1801년(순조 1) 공노비를 해방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관노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사노비는 그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노비제도 자체는 그대로 지속되다가 이것이 완전히 혁파된 것은 갑오경장 때에 이르러서였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동으로 양반호가 현저히 증가한 반면 노비호가 격감되었으니, 노비에서 상민으로, 상민에서 양반으로 신분상승이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한 방법으로는 납속책·신분모칭(身分冒稱)·대구속신(代口贖身)·노비종모법 등이 있었다.
※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1995년),『한국사』34권 - 조선 후기의 사회, 탐구당문화사.
국사편찬위원회(1997년),『한국사』36권 -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탐구당문화사.
국사편찬위원회(1998년),『한국사』31권 -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탐구당문화사.
역사문제연구소(1999),『사회사로 보는 우리 역사의 7가지 풍경』, 역사비평사.
이이화(2000),『이이화 한국사 이야기』10권 - 왕의 길 신하의 길, 한길사.
최영희, 「조선후기에 있어서의 사회변동, 신분제도」, 사학연구, 1963
이준구, 『조선후기 양반신분이동에 관한 탐구』, 1981
강만길, 「고쳐 쓴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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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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