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정의]
▣ [전개]
▣ [내용]
▣ [건강]에 대한 정의
19세기 유럽의 위생개혁운동(Sanitary Reform Movement)
세균학적 발견 : 공중보건운동의 이념적 전환
20세기초 미국 공중보건의 현실
1910년대 미국 보건의료의 상황
▣ [전개]
▣ [내용]
▣ [건강]에 대한 정의
19세기 유럽의 위생개혁운동(Sanitary Reform Movement)
세균학적 발견 : 공중보건운동의 이념적 전환
20세기초 미국 공중보건의 현실
1910년대 미국 보건의료의 상황
본문내용
건국장을 역임했던 섀핀은 '신'공중보건의 이념을 누구보다도 극단적으로 실천했다. 그는 '구'공중보건의 장기설 및 오물이론(filth theory)이 애매모호하다고 비판하면서, "도시에 상수도 급수시설을 도입하거나 정화하는 데는 수백만 달러의 돈이 들지만, 식사 전이나 화장실에서 나와 손을 씻는 데는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라고 대중들에게 설파하였다. 개인위생이 공중보건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미국은 도시화의 물결이 점점 세차게 밀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농촌지역은 많은 미국인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허만 빅스(Hermann Biggs)는 농촌지역의 공중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인물로서 보건소(Health Center)의 설치를 제안했다. 뉴욕州의 보건국장이었던 그는 주정부가 보건소를 짓는 데 드는 비용과 유지비를 절반 정도 부담한다면 농촌지역의 공중보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담은 법안이 주의회에 제출되었을 때, 의사단체의 반대는 매우 격렬했다. 의사들이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보건소가 그들의 기득권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법안은 두 차례나 기각된 후에 주정부는 공중보건 시설의 지원을 지방(county)에 위임한다는 내용으로 통과되었다. 윈슬로우, 섀핀, 로즈노(Milton J Rosenau) 등의 공중보건운동가, 노동자, 농민단체들이 빅스의 법안을 지지하였지만 의사단체의 필사적인 노력을 무력화시키지는 못했다. 이와 같이 보건소운동은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관심을 끌다가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인해 흐지부지되고 만다.
1910년대 미국 보건의료의 상황
1900년대에 불기 시작한 산업재해보상운동은 1910년대가 되면서 강제적인 질병보험 또는 건강보험을 도입하려는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독일의 사회보험제도에 자극을 받은 로이드 죠지(Lloyd George) 경의 주도로 영국도 1911년에 국민건강보험을 실시하게 되자 미국사회는 의료의 사회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바로 일년 후인 1912년에 미국노동법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Labor Legislation)를 중심으로 강제의료보험을 시행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목표는 지금까지도 달성되지 못하고 있는데, 지난 80년 동안 이 문제는 미국에서 끊임없이 정치적·경제적 논쟁의 핵이 되어 왔다.
1910년대 미국 노동자들은 질병으로 인해 약 2천5백만日을 결근하게 되며 이는 하루 2달러 정도의 임금으로 환산하면 약 5천만 달러의 천문학적인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다. 당시의 미국 근로자 가정은 질병, 실업, 노령 중에서 질병을 가장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질병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가계 경제에 미치는 결과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1909년에 예일 대학의 경제학자인 피셔(Irving Fisher)는 당대에 가장 중요한 보고서 중의 하나였던 『국민의 생명』(Report on National Vitality: Its Wastes and Conservation)에서 질병이 사회에 미치는 경제적 손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질병의 예방을 자선재단이나 의사들에게 맡겨두지 말고 대담한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의회는 이 보고서를 무시해 버렸고 이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191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윌슨(Woodrow Wilson)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렇게 19세기에는 도저히 예상할 수도 없었던 현실을 바라보면서 1910년대 미국 공중보건의 지도자들은 - '구'공중보건의 이념을 믿었던 아니면 '신'공중보건에 도취되었건 간에 - 공중보건운동이 기로에 서 있음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유럽과는 달리 자유주의에 의해 형성된 나라여서 연방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복지와 공중보건에 대해 개입하는 사업은 아주 미미했다. 연방정부는 이런 사업은 주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넘겼고 가능한 한 민간부문의 자율적인 기능에 맡겼다. 영국의 제도를 본따서 1879년에 설치된 국가보건위원회(National Board of Health)는 1883년에 없어지고 1902년과 1912년 두 단계에 걸쳐 해양병원국(Marine Hospital Service)을 연방보건국(U.S. Public Health Service)으로 확대했으나 이름에 값하는 기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20세기 초의 미국은 도시화의 물결이 점점 세차게 밀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농촌지역은 많은 미국인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허만 빅스(Hermann Biggs)는 농촌지역의 공중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인물로서 보건소(Health Center)의 설치를 제안했다. 뉴욕州의 보건국장이었던 그는 주정부가 보건소를 짓는 데 드는 비용과 유지비를 절반 정도 부담한다면 농촌지역의 공중보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담은 법안이 주의회에 제출되었을 때, 의사단체의 반대는 매우 격렬했다. 의사들이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보건소가 그들의 기득권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법안은 두 차례나 기각된 후에 주정부는 공중보건 시설의 지원을 지방(county)에 위임한다는 내용으로 통과되었다. 윈슬로우, 섀핀, 로즈노(Milton J Rosenau) 등의 공중보건운동가, 노동자, 농민단체들이 빅스의 법안을 지지하였지만 의사단체의 필사적인 노력을 무력화시키지는 못했다. 이와 같이 보건소운동은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관심을 끌다가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인해 흐지부지되고 만다.
1910년대 미국 보건의료의 상황
1900년대에 불기 시작한 산업재해보상운동은 1910년대가 되면서 강제적인 질병보험 또는 건강보험을 도입하려는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독일의 사회보험제도에 자극을 받은 로이드 죠지(Lloyd George) 경의 주도로 영국도 1911년에 국민건강보험을 실시하게 되자 미국사회는 의료의 사회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바로 일년 후인 1912년에 미국노동법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Labor Legislation)를 중심으로 강제의료보험을 시행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목표는 지금까지도 달성되지 못하고 있는데, 지난 80년 동안 이 문제는 미국에서 끊임없이 정치적·경제적 논쟁의 핵이 되어 왔다.
1910년대 미국 노동자들은 질병으로 인해 약 2천5백만日을 결근하게 되며 이는 하루 2달러 정도의 임금으로 환산하면 약 5천만 달러의 천문학적인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다. 당시의 미국 근로자 가정은 질병, 실업, 노령 중에서 질병을 가장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질병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가계 경제에 미치는 결과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1909년에 예일 대학의 경제학자인 피셔(Irving Fisher)는 당대에 가장 중요한 보고서 중의 하나였던 『국민의 생명』(Report on National Vitality: Its Wastes and Conservation)에서 질병이 사회에 미치는 경제적 손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질병의 예방을 자선재단이나 의사들에게 맡겨두지 말고 대담한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의회는 이 보고서를 무시해 버렸고 이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191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윌슨(Woodrow Wilson)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렇게 19세기에는 도저히 예상할 수도 없었던 현실을 바라보면서 1910년대 미국 공중보건의 지도자들은 - '구'공중보건의 이념을 믿었던 아니면 '신'공중보건에 도취되었건 간에 - 공중보건운동이 기로에 서 있음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유럽과는 달리 자유주의에 의해 형성된 나라여서 연방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복지와 공중보건에 대해 개입하는 사업은 아주 미미했다. 연방정부는 이런 사업은 주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넘겼고 가능한 한 민간부문의 자율적인 기능에 맡겼다. 영국의 제도를 본따서 1879년에 설치된 국가보건위원회(National Board of Health)는 1883년에 없어지고 1902년과 1912년 두 단계에 걸쳐 해양병원국(Marine Hospital Service)을 연방보건국(U.S. Public Health Service)으로 확대했으나 이름에 값하는 기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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