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의 조공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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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전기의 조공관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조선의 유구 통교의 기원

[2] 조선과 유구관계의 전개
사절의 왕래
위사의 성행
조유 통교체제의 구조와 성격

[3] 통교무역
무역형태
교역물품

[4] 피로인과 표류민의 송환
피로인 송환
표류민 송환

[5] 문물의 교류와 상호 인식
대장경의 구청과 하사
기술의 교류
상호인식

[6]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과 유구의 관계

본문내용

것이었으며, 조선에 파견된 유구사신들에 의한 것, 3차례에 걸쳐 유구국왕사로 왔던 일본승 道安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유구에 대한 지식과 인식을 海東諸國記
) 海東諸國記는 성종 2년(1471)에 申叔舟가 편찬한 일본에 관한 저서로서 유구에 관한 것으로는 '琉球國紀', '琉球國圖', '琉球國'(연산군 7년)이 포함되어 있으며, 연산군대 부록으로 첨부된 '유구국'은 유구구구왕사 내빙시 문답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유구국기'는 國王代序·國道·國俗·道路里數의 네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 집대성하였다. 신숙주에 의한 해동제국기에 유구가 포함된 사실은 나름대로 유구를 중시하였으나, 사신을 '來朝'으로 표현하거나 '方物의 헌상' 등과 같은 것을 통해 조공국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신숙주뿐만 아니라 조선관인들의 일반적인 입장이었고, 일부 신하들은 유구국사에 대한 예물의 과다함을 비판
) 세종 13년(1467) 고지지 상소에서는 "유구는 작은 나라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이다. 비상시 구언에 도움이 되지 않고 만일 절교하더라도 잃을 바가 없다. 이웃 나라이면서 대국인 일본과의 균형문제도 있으니 과다한 지출은 불요부당하다."고 표현하였다.
하기도 하였다. 결국 조선은 유구를 외교상 敵禮國으로 인정하면서도 일본과는 구별해 보았다. 한편 유구의 의복과 관제는 중국의 모방하였지만, 문화와 풍속은 일본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6] 壬辰倭亂 이후의 朝鮮과 琉球의 관계
임진왜란 기간중 유구는 명군에 합류해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는 등 우호적 성격을 지속시켰다. 또한 명을 통한 간접통교 방식을 계속 유지해 하면서 유구는 자국의 경사나 급한 사정이 있을 경우 진공사를 통해 국서와 예물을 보냈으며 조선 역시 回서와 회례품을 보냈다. 이같은 조유의 우호적 교류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단절될 때까지 10회에 걸쳐 이뤄졌다.
) -선조 32년 3월 풍신수길의 죽음을 알리고 축하했으며, 이에 대해 조선은 선조 34년 동지사를 통해 동지사를 통해 회답서계와 예물을 진공사에게 전했다.
-광해군 원년(1609) 유구국왕 尙寧의 명 책봉 사실을 국서로 보내면서 '형제의 예'로서 우호를 유지하고 했으며 광해군 역시 자신의 즉위와 책봉 사실을 유구국왕에 알렸다.
-광해군 13년 상녕의 죽음을 조선에 알림
-인조 원년(1623)
-인조 3년
-인조 9년 / 인조 12년 回계와 예물을 보냄
-인조 14년
병자호란을 계기로 유구와 통교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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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16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6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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