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제주의 왜구침입과 방어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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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전기 제주의 왜구침입과 방어시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의 왜구침입 양상

Ⅲ. 왜구의 제주침입 실태

Ⅳ. 제주도민의 대응 및 방어시설
1. 방어시설의 정비
2. 방어시설의 내容

Ⅴ. 맺음말

본문내용

는 제도였다. 이러한 제도가 정식의 법으로 제정하여 실시한 것은고려 의종 3년(1149)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정식으로 봉수 제도를 마련하였다.
도내의 봉수대는 크게 산(오름) 정상부에 설치된 봉수와 해안 구릉에 설치된연대로 나눌 수 있다. 봉수와 연대의 기능적 차이는 봉수대는 50리 밖을 감시하고, 연대는 현장 가까이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봉수는 일반적인 경우 석축암이 없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 봉덕시설을 하였고 밑에는 이중의 배수시설로 도량을 만들었다. 연대는 해안을 감시하기 용이하고 적과 전투시 유리한 곳에 石築하였다. 축조 규정에 의하면, 높이 30척, 밑변은 1변의 길이가 20척인 방형의 축대를 쌓았다. 대부분 해안의 높은 지대에 방형으로 축대하였다. 간혹 지형에 따라 圓形으로 축대한 곳도 있다.
봉수에는 별장(別將)과 봉군(烽軍), 연대에는 별장(別將)과 煙軍(直軍)이 있었으나, 시대에 따라 그 인원수는 증감이 있었다. 그리고 봉수·연대의 요원은 근처에 사는 백성으로 배치하여 1번(番 :組 )에 별장 2인과 봉군(煙軍) 4명 내지 12명으로 조직하여 3교대로 守直하였다. 따라서 봉군(연군)에게 다른 군역은 부과하지 않았다.
3 城
9 鎭
봉 수
응 소 지 역
연 대
응 소 지 역
정의현성
서귀진
삼매양봉수
호촌봉수
자배봉수
동 : 호촌, 서 : 귀산
동 : 호촌, 서 : 귀산
동 : 호촌, 서 : 귀산
연동연대
보목연대
우미연대
금로포연대
동 : 보목, 서 : 변수
동 : 우미, 서 : 연도
동:금로포, 서 : 보목
동 : 벌포, 서 : 우미
수산진
수산봉수
성산봉수
지미봉수
동 : 성산, 서 : 독자
동 : 지미, 서 : 수산
동 : 성산, 서 : 왕가
협자연대
오조포연대
종달연대
북:오조포, 서:말등포
남 : 협자, 북 : 종달
남:오조포, 서 : 입두
3 城
9 鎭
25 烽燧
38 煙臺
이러한 봉수 및 연대를 사용하여 교신하는 제도가 정식의 법으로 제정하여 실시한 것은 고려 의종 3년(1149)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에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하였다. 봉수의 횟수는 炬 또는 擧 로 나타내는데, 여말선초에는 무사시에 1거, 유사시에 2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를 세종 원년(1419)에 평사시에는 1거, 적이 나타나면 2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거, 국경을 넘어오면 4거, 접전을 하면 5거를 올리도록 정하였다.
Ⅴ. 맺음말
조선시대에 들어 제주는 중앙집권체제 하에서의 과대진상 요구에 왜구의 침입으로 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데, 특히 왜구의 침입에 많은 악영향을 받았다.
제주에 왜구침입 기록을 보면 고려 충숙와 3년(1316)부터 명조 11년 (1556) 간 240여년 동안 30여회의 침입이 있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왜구의 주 침입 대상이 중국이었는데 제주가 종국으로 왕래하는 항로상에 위치하여 더욱 빈번하게 약탈당하였다.
이와 같은 왜구의 침입에 따른 방어시설이 구체적으로 정돈되기 시작한 시기는 세종 19년(1473) 한승순 목사가 부임하면서부터 공고히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3城 과 9鎭 ,25烽燧, 38煙臺의 방어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어시설은 제주를 왜구의 침입으로서 보호하는데 그리 큰 역할을 행하지 못하였다. 우선 방어시설에 동원되는 병력이 제주인만으로는 불가능 하였다. 그리하여 종전에는 전라도에서 병력이 보충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붙처는 중단되었다. 또한 제주의 水軍이 현종 5년(1664)에 혁파됨으로써 병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무기와 선박 기술 수준은 왜구와 대등하게 겨루기에는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왜구 침입에 대한 방어는 견고하게 잘 마련된 방어시설이나 충분한 병력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을묘왜변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끊임없이 항쟁하는 제주인의 정신이 어떳한 방어시설보다 큰 힘을 발휘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참 고 문 헌 ♧
1. 방상현, 「朝鮮前期 城郭 機能考」, 『史學誌』16, 1982.
2. 차용걸, 「朝鮮前期 關防施設의 整備過程」, 『韓國史論』7,1983.
3. 박용후, 「濟州道의 城地 및 防禦施設」, 『濟州道』66, 1975.
4. 濟州道, 「濟州道誌 (上)」, 『제주신보사』, 1993.
5. 김병하, 「耽羅文化 제8호」,『濟州大學校耽羅文化硏究所』,1989.
6. 濟州道, 「濟州의 防禦遺蹟」, 『濟州道』, 1996.
7. 濟州歷史硏究會, 「濟州人의 삶」, 『濟州歷史硏究會』,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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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23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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